그건 어느 여름날, 도내에서 열린 격투 대회의 결승전 날이었습니다.
평소의 꾸준한 연습 덕분에 무사히 우승을 거두긴 했지만...... 저는 조금 수심에 잠겨 있었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제가 대회에 참가한 까닭은 모든 이에게 스모가 얼마나 멋진 것인지 알려드리고 싶어서였으니까요. 물론 스모 선수정도로 타협하지는 않을 겁니다. 스모의 무대에서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부딪치고, 우승을 이루어 내는 것이 목표예요.
그리고 이번 대회를 통해 그러한 제 목표에 걸맞은 스모를 보여드렸다고 자부한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희 스모부와 함께 할 새로운 부원은 찾지 못했어요.
스모에 관심을 가져주셨는지 세리머니 후에 기자분들이 찾아오셨어요. 그분들께도 말씀드려 보았지만, 좋은 대답은 듣지 못했지요.
대기실에서 홍차를 마시며, 조금 울적한 기분에 빠져 있었던 이유는 그 때문이었답니다.
그러던 중, 누군가 갑자기 문을 두드렸습니다.
"실례하겠습니다. 시조 히나코 님, 잠깐 괜찮으신지요?"
"네, 들어오세요~"
검고 반듯한 정장 차림의 중년 남성 두 분이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사장님께서 히나코 님과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건네받은 스마트폰을 들자,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조금 전의 활약은 잘 봤어. 너 같은 파이터를 찾고 있었거든."
마치 가극 스타처럼 당당하고 의연한 말투. 여성의 힘찬 목소리였어요.
그 목소리와 말투가 기억에 생생해서 바로 알아차렸답니다. 이 목소리는 아나스타샤 씨. 나는 새도 떨어뜨릴 기세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고 있는 기업의 사장님이세요.
아버지와 면식이 있다고 듣긴 했지만, 혹시 VIP석에서 보고 계셨던 걸까요.
"널 보자마자...... 이거다 싶었지! 탁월한 센스, 세련된 기술.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너였어, 미스 히나코!"
전화기 너머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계실 거라는 생각이 들 만큼 활기찬 목소리가 대기실에 울려 퍼졌습니다.
바로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생생하게 전해질 정도니까요. 분명 친절하고 상냥한 분일 거예요.
"어머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 전화를 건 이유는 네 재능을 보고 한 가지 제안하고 싶어서야. 어때, 미스 히나코. 내가 경영하는 스포츠 클럽으로 이적할 생각은 없어? 스모를 널리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전속 파이터로서 네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할게."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학우들과 함께 연습하는 즐거움과 맞바꿀 수 있는 건 없는걸요~"
"물론 그 학우들과 함께 이적해도 돼."
"어머나~ 이렇게 열심히 스모부 이야기를 들어주시다니......――앗?!"
저도 참, 이야기에 열중한 나머지 깜빡했네요.
아나스타샤 씨가 스모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으니, 제가 먼저 입부 제안을 해야 했는데...... 이럴 수가. 히나코,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불찰이에요.
"――하지만 그 제안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조건을 붙이고 싶어. 미스 히나코에게 그 물건을 건네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검은 옷의 남성분께서 제게 봉투를 한 장 건네주셨습니다.
고급스럽게 장식된 그 봉투는 고풍스러운 인장으로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양피지로 만들어진 걸까요? 촉감이 부드럽고 매끄러웠습니다.
"뒷면에 적혀 있듯, 이건 KOF 특별 추천장이야. 이것만 있으면 넌 내가 추천한 파이터 자격으로 대회에 참가할 수 있어."
아나스타샤 씨의 말을 듣고 봉투를 뒤집으니, 그곳에는 『KOF 특별 추천장』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어머나, KOF라니. 그 단어에 여러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납니다.
마이 씨, 킹 씨, 유리 씨...... 그리고 마 씨. 다들 건강하실까요?
"네가 이 대회에서 우수한 전적을 남기고, 세계에서 활약할 만한 스모 레슬러라는 걸 증명해 낸다면...... 조금 전에 한 제안은 성립돼. 그땐 너와 네 학우를 우리 아나스타샤 스포츠 클럽으로 초대할게!"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적은 어렵답니다~ 아나스타샤 씨가 스모부에 들어와 주신다면 다들 좋아할 텐데요~"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하자, 아나스타샤 씨가 의자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네 소원을 이루고 싶다면, 우승하도록 해! 미스 히나코!"
활기찬 응원의 말을 끝으로 통화는 뚝 끊겼습니다.
정적이 찾아온 대기실에서 저는 차분히 생각했어요.
이 대화의 뜻은 즉――...... KOF에서 우승하면 아나스타샤 씨가 스모부에 입부해 주신다는 거죠.
KOF에는 마이 씨를 비롯한 다른 분들도 계실 거예요. 전 세계에 스모의 매력을 전하고, 다른 분들의 얼굴도 뵙고, 신입 부원도 잔뜩 데리고 올 수 있는 거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매력적이고 근사한 계획이네요.
저는 곧장 봉투에서 특별 추천장을 꺼내어 동의란에 서명했습니다. 추천장을 받은 검은 옷의 남성분은 예의 바르게 인사한 후 대기실을 떠났습니다.
"그럼 우승을 목표로 힘내겠어요~"
우선 오늘 밤엔 창코나베를 먹어야겠네요. 저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전전 대회 이후 소식이 뜸했던 엘리자베트 블랑토르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편지에서 엘리자베트는 오래 연락하지 않은 점을 사과하면서, KOF가 끝나는 대로 상하이에서 『어느 인물』을 소개하고 싶다는 의향만을 아름다운 글씨체로 간결하게 전달했다.
내용에서 여전히 꼼꼼함이 느껴져 엘리자베트와 사이가 나쁜 쉔 우가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자신이 감상에 젖는 성격이 아님을 잘 알면서도, 쉔과 만난 이 거리로 자연스레 발길이 향한 이유는 자기 생각보다 미련이란 게 남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천루가 죽 늘어선 찬란한 상하이 거리의 중심에서 한 청년이 소리 없이 걷고 있다.
동양풍 차림에 어딘가 애처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청년의 미모는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청년은 남들 시선이 닿지 않는 어둠 속을 아무도 모르게 나아갔다.
그림자처럼 조용한 그 미남 청년――듀오론은 친구인 쉔과 오랜만에 만날 약속을 잡아 두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는 데다 솔직히 그 쉔이 말썽이나 지각 없이 시간 맞춰 도착할 것 같지 않으니, 시간을 때울 겸 산책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걸어도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이것 참, 어쩌면 좋을까......"
듀오론은 품에서 꺼낸 봉투에 시선을 던지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듀오론이 고민하는 이유는 바로 이 봉투였다. 『KOF 특별 추천장』이라 적힌, 고풍스러운 인장으로 봉인된 양피지 봉투는 듀오론이 엘리자베트의 편지를 받은 바로 다음 날에 도착했다.
딱히 KOF라는 대회 자체가 꺼려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배신자이자 비적의 수장, 다름 아닌 친아버지 론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두 번 참가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두 번 모두 좋지 않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헛걸음으로 끝났으니, "이번에야말로"라는 식의 희망을 품어 봤자 의미가 없을 것이다. 거액의 상금도 듀오론에게는 쓸모가 없다. 이 봉투가 도착한 타이밍도 이상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점조차 살짝 의심스럽다.
"이제 와서 마음이 끌릴 이유 따윈...... 아무것도......"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듀오론이 KOF에 참가할 이유는 역시 없다.
그런데도 왠지 이 봉투를 버릴 수가 없다.
문득 고개를 드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걸음을 늦추고 근처 빌딩의 대형 모니터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스피커에서 떠들썩한 음악이 울리는가 싶더니, 『Martial Mayhem KOF SPECIAL』이라는 요란한 자막이 모니터 안을 스쳐 지나간다.
이번 KOF는 스폰서 기업이 붙어서인지 예전보다 훨씬 특집 보도가 늘어났다. 특별 참가자라고는 해도 듀오론의 본업은 암살자다. 그 부분 때문에 마음이 내키지 않기도 했다.
"이어서 『KOF』에 참가하는 선수의 독점 인터뷰입니다! 이 영상을 보시죠."
영상은 스튜디오에서 프랑스의 큰길로 바뀌었고, 인터뷰어와 대면 중인 두 남녀의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화려한 거리를 배경으로 의연하게 선 사람은 듀오론도 잘 아는 프랑스 아가씨, 엘리자베트 블랑토르쉬다. 그 옆에 서서 얼굴을 후드로 가린 남자는 엘리자베트의 팀 동료겠지.
"쿠크리 선수는 이전 대회에 이어 연속 참전하셨죠. 엘리자베트 선수도 과거 대회에 몇 번 출전하신 경험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네. 이번 대회에서도 블랑토르쉬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싸움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엘리자베트의 당당한 표정을 보고 듀오론은 씩 미소를 짓는다.
쉔, 엘리자베트와 팀을 짜 출전한 지난 KOF. 그 대회는 무언가 이상했다. 듀오론은 물론 천하의 쉔마저도 기분 나쁜 위화감과 상실감에 한동안 골머리를 썩일 정도였다.
그때 피날레 불꽃이 솟아오르던 와중에 빨간 머리띠를 움켜쥐고 생기 없는 얼굴로 어디론가 걸어가던 엘리자베트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팀으로서 남은 건 지극히 평범한 전적이다. 가문의 이름에 먹칠할 만한 추태를 보인 것도 아닌데 그 후로 엘리자베트는 자기 저택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엘리자베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미디어 앞에 모습을 드러낸 엘리자베트의 표정을 보니 아마 그 문제를 극복해 낸 모양이다.
벗의 안부를 확인해 만족하고 듀오론이 그 자리를 떠나려던 때였다.
"이번 대회가 첫 출전인데...... 마음가짐은 어떻습니까?"
그대로 모니터에서 떨어지려던 듀오론의 시선이 헤실헤실 웃는 그 얼굴에 꽂힌다.
그 사람은 인터뷰어가 내민 마이크에 호응하듯이 화면 바깥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 깔보는 듯한 미소, 애교와 심술궂음이 공존하는 듯한 주근깨 얼굴에 있지도 않은 기시감이 들었다.
"후후, 그러게. 첫 출전이라 두근두근해♪"
들어본 적이 있을 리 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점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들었던 기묘한 위화감과 상실감이 머릿속을 뒤흔든다. 현기증과도 같은 감각 속에서 잊어버린 무언가가 조금만 더 있으면 떠오를 듯한 초조함이 더해진다.
기우뚱하고 자세가 무너진 듀오론은 벽에 어깨를 비비며 몸을 지탱하면서 다시 모니터로 눈길을 돌린다. 그때 카메라 너머로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애쉬』다......! 애쉬 크림존......!"
그 이름을 말로 꺼낸 순간, 듀오론의 의식이 선명해졌다.
퍼즐 조각이 딱 맞아떨어진 것처럼 애매한 기억이 새롭게 덧씌워진다.
"의외로 옛날에 알던 사람이 볼지도 모르잖아? 친구가 실망은 안 하게끔 노력해 볼게."
애쉬는 그렇게 말하고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든 뒤 떠났다. 그러고는 눈에 띄지 않으려는 후드 쓴 남자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러 갔지만, 거기서 주의를 돌리려는 듯 엘리자베트가 헛기침하며 인터뷰어의 옆으로 돌아왔다.
듀오론은 무심코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어느새 자신이 움켜쥐었던 특별 추천장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넌 방심할 수 없는 녀석이야......"
세게 움켜쥔 탓에 꼬깃꼬깃해진 봉투를 손가락으로 펴면서 듀오론은 소리 없이 발길을 돌려 밤거리로 사라졌다.
그 입가에 어렴풋이 웃음이 번졌지만, 그곳에 있던 사람 중 누구도 그 미소를 보지는 못했다.
스승이 말하길, 『차원의 마물』은 인간의 지성을 초월한 존재이며, 우주가 창조된 이후 계속 가까이에서 이 세계를 감시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 마물은 이쪽 세계에서 직접 볼 수 없으나, 태고부터 이어진 사람들의 탐구심과 의지 덕에 그에 관한 전승이 전해 내려온다. 예고 없는 자연의 이변, 세계의 이치에 반한 이상 사태. 종종 일부 사람들이 이능력을 사용하면서 그런 이변을 탐구해 그 힘의 편린 내지는 정체에 다가갔으며, 후세에 화를 남기지 않도록 지혜를 전수했다.
언젠가 그 존재가 섭리를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날 때는 아바야의 힘으로 마물을 사냥하는 것이 정의의 파수꾼――즉, 나즈드가 해야 할 역할이었다.
그러나 오랜 역사 속에서 차원의 마물이라는 존재에 관한 전승을 자아낸 건 나즈드의 일파만은 아니라고 한다.
아프리카 대륙에 펼쳐진 사막 깊은 곳에 그 마물을 죽음과 재생의 신으로 숭배하며, 마물의 출현을 능숙하게 예지하던 일족이 존재했다.
피가 아닌 지식으로 대를 이어 온 자들――그들의 마지막 족적을 쫓아 나즈드는 아프리카 대륙 내 오지를 찾았다.
오아시스 옆에 고요하게 숨 쉬는 마을, 그곳의 어느 민가에 나즈드와 가이드가 발을 들였다.
"집주인은 꽤 예전에 세상을 떴다나 봐. 안타깝게도 모래 폭풍에 휘말렸다고 하더군......"
집주인 생전엔 꼼꼼하게 관리했겠지만, 지금은 바닥에 모래 섞인 먼지가 희미하게 쌓여 있고, 최근 한동안 사람이 드나든 흔적도 없다.
하지만 창과 문은 삭지 않고 남아 있어 오랜 세월 방치된 것치고는 묘하게 관리된 느낌이 든다. 친절한 이웃 주민이 계속 관리해 주었다고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는 정도지만, 나즈드는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정말 사람이 없는 거야?"
나즈드의 질문에 가이드는 방 안을 휙 둘러보고, 슬픈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웃집 노인 말로는 아이가 집안을 이었다는데...... 이 상태로 봐서는 한동안 아무도 없었을 거야. 그러니까 이런 꼴이겠지......"
가이드의 시선 끝에는 뒤엎은 것처럼 엉망이 된 책꽂이가 있다. 빈집이 되고 나서 도둑이라도 든 걸까. 돈이 될 만한 책은 모조리 훔쳐 간 듯하고, 바닥에 떨어진 건 석판과 양피지뿐이다. 그마저도 모두 심하게 손상되었다.
나즈드는 사진 한 장을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찾던 물건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같이 와 줘서 고마워. 그리고 도시로 돌아가고 나서 말인데...... 도둑맞은 물건을 찾고 싶어. 정보상을 소개해 줄래?"
"물론이지."
가이드는 그렇게 말하고 웃으며 어질러진 집에 기도의 말을 남기고 나갔다.
나즈드는 가이드의 말을 따라 한 뒤 다시 한번 어질러진 집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사라진 일족의 마지막 대은자가 남긴 원고...... 그 일족의 한을 갚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찾아야 해."
스승에게 받은 한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나즈드는 조용히 미간을 찌푸렸다.
한 권의 원고를 쫓는 여정은 나즈드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우수한 가이드가 좋은 정보상을 소개해 준 덕분에 대은자의 집에서 도둑맞은 책의 족적을 쫓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여러 도시와 가게를 거친 끝에 그 원고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도달했다.
좁은 골목의 후미진 곳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그 헌책방이 여정의 종착지였다.
그 가게는 굳이 말하자면 잡화점이라 부를 만한 외관이었다. 가게 안은 물건들이 잡다하게 진열되어 좁게 느껴졌지만, 상품은 모두 잘 관리된 상태라 하나하나 소중히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즈드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고상한 테이블에 앉아 독서를 즐기던 가게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 나이 든 남자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이 사진 속의 상품을 찾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며 나즈드는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오래된 원고를 촬영한 낡은 사진을 들여다보며, 늙은 주인은 미간에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갑자기 "아아" 하는 소리를 내더니 나즈드에게 사진을 돌려주며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미 팔렸어."
"팔렸다고? 설마......"
아프리카의 대은자가 남긴 원고라 해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가치가 없는 물건이다. 특히 이 건은 나즈드의 스승 정도의 인물만 아는 전승이었기에, 원고가 팔렸다는 사실은 바로 믿기 어려웠다.
차원의 마물을 불온한 일에 이용하려는 자일까, 혹은 수상쩍은 민간 전승에 매료된 호사가일까. 어느 쪽이든 누가 어떤 목적으로 원고를 가져간 것인지 파악해야 했다.
"상품을 사 간 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남자야. 얼굴은 기억 안 나. 후드로 가리고 있었거든."
"후드로 얼굴을 가린 남자...... 다른 특징은?"
"글쎄. 목소리를 들으니 젊은 사람 같았는데......"
손짓 발짓을 섞어 가며 이야기하는 사이에 기억이 돌아왔는지 주인은 몸을 내밀고 말을 이었다.
"기억났어. 그 남자 옷이 묘하게 먼지가 많고, 손끝까지 모래투성이였거든. 그래서 사막에서 구르기라도 했냐고 물어봤는데......"
수다스러운 주인의 말을 들으며 생각에 잠긴 나즈드의 뇌리에 한 청년의 모습이 스쳤다.
후드를 깊이 눌러쓴 수상한 모습에, 후드 아래에서 튀어나오는 폭언과 예의 없는 태도. 무엇보다도 그가 지닌 모래의 이능력. 그가 다루는 모래와 겹치듯 아프리카 오지의 폐가에서 본 모래 먼지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말이 빠르고 말버릇이 고약하기도 했어?"
나즈드가 그렇게 묻자 주인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자기가 정당한 소유자라나 뭐라나 소리를 질러 댔지. 다른 책을 더럽히면 곤란하니까 얼른 책을 팔고 쫓아내 버렸어. 뭐, 그놈은 호사가도 학자도 아니고, 아가씨처럼 성실한 학생도 아닌 것 같아. 괜히 엮이지 않는 편이 좋을걸."
늙은 주인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투덜거리며 이전 손님에 대해 불평하다가 곧 나즈드의 눈을 보고 사람 좋게 쾌활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가볍게 몸을 흔들며 주위에 진열된 고서의 바다를 빙 둘러보았다.
"아무튼 그렇게 됐지. 또 필요한 물건 있어?"
나즈드는 늙은 주인의 시선을 좇아 가게 안을 보았다.
다양한 언어의 고서를 비롯해 수제로 보이는 나무 조각상과 천장에 매달린 유리 램프, 벽에는 태피스트리까지. 용무가 끝났다고 바로 떠나기엔 아까울 정도로 이 작은 헌책방은 매력이 흘러넘쳤다.
나즈드는 잠시 고민하면서 상품 하나하나에 시선을 옮겼고, 그러다 선반 상단에 장식된 향수병 하나를 쥐었다.
"이건 얼마지?"
"아가씨가 보는 눈이 있네. 싸게 해 줄게."
정성스럽게 종이에 상품을 싸서 건넨 주인에게 인사한 뒤, 나즈드는 가게를 떠났다.
골목길을 지나 모퉁이를 돌아 지면에 선명히 드리운 옅은 그림자 속으로 나즈드가 들어간다. 사람들로 붐비는 큰길의 소란도 여기에는 닿지 않고 귀가 아플 정도의 정적만이 주위에 가득 찼다.
"마물 앞에서도 동요조차 안 하던 태도로 보아 뭔가 비밀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쿠크리라고 했던가? 그 남자가 대은자의 후계자였다니."
나즈드의 중얼거림도 메마른 바람을 타고 어딘가로 사라져 간다.
"스승님 말씀대로 그 대회가 모든 열쇠를 쥔 것 같네. 꼭 모든 운명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나즈드는 그렇게 말하며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아바야 안에 숨겨 둔 또 한 장의 편지――『KOF 특별 추천장』이라 적힌, 고풍스러운 인장으로 봉인된 양피지 봉투를 꺼냈다.
투사들의 기운을 집어삼키고 차원의 마물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나즈드가 정의의 파수꾼으로서, 어느 청년이 대은자의 후계자로서 그 싸움에 향하듯이, 다양한 목적과 운명을 품은 자들이 같은 곳에 모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예감이 아닌 확신이었다.
봉투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나즈드는 한 걸음 내디딘다. 아바야 소매가 한들거리는 그 뒷모습은 그림자 진 길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
――실비 폴라 폴라는 격노했다.
반드시 그 음습한 모래 자식, 쿠크링을 혼내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은 실비가 중국에서 프랑스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한낮의 파리 시내에서 생긴 일이었다.
실비는 눈알 친구와 한창 산책하던 도중, 화려한 산책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뒷모습을 우연히 보게 됐다. 걸을 때마다 모래를 돌바닥에 떨어트리는 그 청년의 음침한 뒷모습을 실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친구와 만나면 당연히 인사를 해야지.' 실비는 예의 바른 여자아이였기에 크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 쿠크링!"
"큭!?"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 청년―― 쿠크리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더니, 실비를 보자마자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드러내듯 입가를 일그러트렸다.
"네놈이 어째서 여기에...... 그보다 큰소리 내지 마, 이 땅딸보 녀석!"
그가 욕설을 퍼붓는 건 언제나 있는 일이었기에 실비는 개의치 않고 그에게 달려갔다.
"쿠크링이 보낸 물건은 미안한테 잘 전달됐어! 지금은 폴라가 맡아두고 있고. 이것 봐."
보낸 물건이 제대로 도착했다고 전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실비는 가방에서 손때 묻은 스크랩북을 꺼내 보여주었다.[文字列の折り返しの区切り] 하지만 쿠크리의 입가는 점점 일그러졌다. 그야말로 벌레라도 씹은 듯한 모습이었지만, 실비가 보기에는 그저 부끄러움을 숨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여기서 친구의 이변을 눈치채지 못한 실비에게도 잘못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있잖아, 쿠크링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실비는 스크랩북을 펼치더니 자신이 봐두었던 페이지를 찾았다. 그 페이지에는 난잡하지만, 어딘가 다급하게 쓰인 한 글자가 있었다. 그 글자를 보니 어쩐지 으슬으슬한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실비는 그곳에 적힌 글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쿠크리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 『오토마 라가』란 게 뭐야? 폴라는 어쩐지 들어본 적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없는 거 같기도 하고, 본 적이 없는 거 같기도 하고 있는 거 같기도 한데――"
대답은 없었다. 다만, 실비는 후드에 감춰진 그의 눈이 커지는 것을 보았다.
경악 아니면 경계일까.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시선은 스크랩북과 실비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까지 놀라는 쿠크리의 모습을 실비는 본 적이 없었다.
"너, 어디까지......"
목구멍을 막고 있던 공기를 밀어내듯이, 쿠크리는 말을 토해냈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하는가 싶더니, 실비가 무심코 뒷걸음질 칠만한 기세로 그녀의 코끝에 손가락을 들이댔다. 그가 크게 팔을 휘두른 탓에 모래가 흩날려, 실비의 허리 부근에 있는 눈알 친구에게 후드득 쏟아졌다.
"마지막 충고니까 귓구멍 열고 그 눈곱만한 뇌에 잘 새겨둬...... '더는 참견하지 마'! 이건 너와는 1밀리그램도 관계없는 이야기다. 큰일 겪고 싶지 않으면 집에서 그 눈알 친구랑 잠이나 자라고, 알겠어?!"
속사포로 쏘아붙이나 싶더니, 쿠크리는 재빠르게 달아났다. 달아나는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실비가 "날 따돌린 거네"라고 이해했을 땐 이미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여기까지 와서야 비로소 실비는 확신을 얻었다.
쿠크리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그것도 그의 미래를 좌우할 정도로 중대한 내용을. 실비의 비밀 결사 네스츠처럼, 그에게 있어 중요하고 엄청난 무언가가 접근해 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친구인 실비와 미안과 나눌 수 있는 고뇌와 어려움일 터. 실비는 쿠크리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분했으며, 동시에 자신과 미안한테 의지하지 않은 쿠크리에게 격노했다.
"......그런 일이 있었어. 확실히 폴라는 좀 의지가 안 될지도 모르지만, 이야길 들어주는 정도는 할 수 있는데."
그리고 현재, 마을 한 구석의 찻집에서 실비는 쿠크리를 향한 푸념을 늘어놓고 있다.
푸념 상대는 꽃미남 격투가 리서치 중에 SNS로 알게 된 동호인이자, 실비보다 연상인 멋진 언니―― 셸미다. 패션 디자이너라는 그녀와는 옷 취향에 관한 이야기도 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눈알 친구를 "귀엽다~♡"라고 말해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지금은 이렇게 시간이 맞을 때마다 종종 오프라인 모임을 갖는 사이까지 되었다.
셸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면서 유리잔 밑에 고인 소다를 빨대로 빨아올리는 실비를 앞머리 너머로 바라보며, 뺨에 손을 얹고 머리를 갸웃거렸다.
"하긴 친구가 뭔가를 숨기는 건 싫지. 내가 관련돼 있을 것 같은 일이면 더 그렇고."
"쿠크링도 내가 똑같이 그러면 분명 싫어할 거면서...... 자기가 당하면 싫은 일은 다른 사람한테도 하면 안 된다는 걸 폴라가 직접 알려주고 싶어."
빨대에서 입을 떼고 실비는 눈썹을 내렸다.
"폴라는 미안이랑 쿠크링하고 같이 KOF에 나가고 싶었는데."
셸미는 슬픈 듯이 고개를 떨군 실비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턱에 손가락을 대더니, 갑자기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가슴 앞에서 손뼉을 쳤다. 그리고 고개를 든 실비에게 한 장의 봉투를 건넸다.
"실은 나도 친구들과 KOF에 출전하는데, 초대장 말고 이런 것도 받았거든~♪"
셸미는 고풍스러운 봉랍으로 봉인된 양피지 봉투를 실비의 손 위에 올려놓더니 뒤집어 보라는 듯이 말했다. 그 말에 따라 실비가 봉투를 뒤집어 보니, 그곳엔 한 문장이 쓰여있었다.
"KOF...... 특별 추천장!?"
"안타깝게도 특별 추천권으로 출전하려면 운영 측이 편성한 팀으로 참가해야 하지만, 그래도 대회에는 출전할 수 있어. 친구에게 설교할 기회가 될 거 같은데...... 어때?"
"우와~! 이렇게 귀한 걸 폴라가 받아도 돼?"
"물론이지! 나는 실비가 이길 거라고 믿으니까."
밝게 웃는 셸미의 말에 실비도 덩달아 웃었다. 으흐흐 하고 이를 보이며 웃고는, 받은 봉투를 포셰트 속에 소중히 넣었다.
"고마워, 셸미! 폴라, 쿠크링에게 설교하는 건 물론이고 이겨서 셸미 팀과도 겨루러 갈게!"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실비는 포셰트를 닫으며 주먹을 꽉 쥐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를 위해 싸우는 실비 폴라 폴라'라니, 분명 옛날의 고물 덩어리 실비에게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실비는 그런 지금의 자신이 조금 자랑스럽고 기뻤다.
실비는 눈알 친구를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미소 지었다. 그리고 눈앞에 놓인 먹다 만 타르트를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빛이 녹음 울창한 산속을 비춘다.
오두막은 사람도 짐승도 가지 않을 법한 깎아지른 절벽 위에 고요히 자리하고 있다.
오랫동안 누군가 계속 써온 곳일까? 오두막 외관은 비바람을 맞은 탓에 이곳저곳 성한 데 없이 삭았지만, 곳곳에 보이는 수리 흔적은 최근 것인 듯하다. 쌓여 있는 장작의 그루터기는 아주 최근에 생긴 듯하다.
작은 바람에 삐걱거리는 문 너머, 황폐한 수련용 오두막 안에 한 남자가 조용히 앉아 있다.
천정으로 스며드는 빗물이 뚝, 뚝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 공간에서, 반석같이 고요하게 미동조차 하지 않는 남자의 이름은 깁갑환이다.
조용히 눈을 감은 얼굴은 예리하고 사나우며, 예전보다 볼이 야위었고 눈가에는 희미한 그늘이 져 있다. 어떻게 보면 갈고 닦은 무인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이 보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할 것이다.
'홀쭉 야위었네'.
지난번 KOF가 끝나고, 갑환이 스승인 강일과 함께 이 산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을까.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된 후 겨울이 지나갔다. 그동안 야산에 피는 색색의 꽃들과, 파릇파릇하게 펼쳐진 초록 잎, 붉게 물든 단풍을 보거나 눈이 내리는 풍경에 감동할 여유는 전혀 없었다.
갑환은 그저 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1년 동안 했던 가혹한 수련의 기억이 갑환의 눈꺼풀 안쪽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자, 이 훈련 오랜만이지? 초심으로 돌아가서 올라와 봐라, 갑환!"
강일은 산의 경사면 위에서 갑환을 향해 통나무를 마구 굴리며 웃었다.
그의 말대로 갑환은 처음 그에게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이 수련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속도와 양에 차이가 있다. 친절하게도 지면에는 함정이 몇 개나 설치되어 있어,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발목을 잡혀 넘어지고 만다. 그때는 좀 봐준 거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갑환은 몇 번이고 통나무에 깔려 버렸다.
"이 근처에 난폭한 곰이 살고 있어서 사람들이 곤란해 하고 있다더군. 이것도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힘내!"
강일은 웃으면서 난폭한 곰이 활보하는 구역에 갑환을 두고는 사라졌다.
산기슭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평온을 위해서라면 어떤 강적이든 견뎌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싸움 역시 너무나 가혹했다. 사람을 습격하는 데 이골이 난 짐승과의 싸움은 사흘 밤낮 이어졌고, 낮에도 밤에도 주위 경계를 게을리해선 안 되는 생활에 갑환은 정신적으로 지쳐 갔다.
수련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눈을 뜨니 두 손과 두 발이 묶여 처음 본 계곡에서 굴러떨어지는 중이거나, 산기슭에서 정상까지 바위를 옮기기도 했고, 겨울 강에 들어가 맨손으로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강일은 "잘하고 있으면 내가 먼저 연락하마"라고 말했지만, 최근 1년간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은커녕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태권도야말로 세계 최강의 격투기다'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태권도를 향한 열의도, 사범으로서 마주하고 짊어져야 하는 것에 대한 책임감도, 확실히 이 수련을 통해 점점 더 강해졌다. 기술도 연마하고 육체도 단련하며 갑환은 확실히 강해졌다.
하지만 수련을 연마했다는 걸 바꿔서 말하자면, 몸이 깎여서 반쪽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정의감과 열정을 가진 갑환이지만 그 역시 인간이다. 아픔을 느끼면 괴로움도 느낀다.
시간이 갈 수록 마모되어 가는 갑환과는 다르게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스승의 밝은 미소와 호쾌한 웃음뿐이었다.
다시 말해, '솔직히 힘들다'라는 뜻이다......
갑환은 천천히 눈을 뜨고 두 눈으로 예리한 눈빛을 발하며 정면을 노려보았다.
그의 앞에는 고풍스러운 봉납으로 닫힌 양피지 봉투가 놓여있었다. 겉면에는 『KOF 특별 추천장』이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끝내야만 해......!"
가슴 깊은 곳에서 쥐어짜낸 듯한 외마디와 함께 갑환은 집어 든 봉투를 꼭 쥐었다.
허리띠를 조이고 봉투를 세게 쥐면서 갑환은 수련용 오두막 밖으로 나갔다.
오두막 밖으로 한 발 내딛자, 봄이 온 것을 알리는 듯한 바람이 흙과 비 냄새를 품은 공기와 함께 갑환의 곁을 소리 내며 지나갔다. 폐 가득히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자, 피폐했던 정신이 조금 치유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갑환, 내려가는 거냐?"
갑자기 들려온 말에 갑환이 뒤돌아보자 강일이 오두막 벽에 기대어 있었다. 표정은 평소처럼 밝지 않았고, 진지함 그 자체였다. 그의 시선은 갑환이 손에 쥐고있는 봉투로 향했는데,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갑환은 강일을 마주하고는 예리한 얼굴에 상쾌한 미소를 띠며 머리를 숙였다.
"스승님! 1년간 지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하산하여 KOF라는 무대에서 수련의 성과를 시험해 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결의와 열의가 깃든 제자의 말을 듣고, 강일은 잠시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한번 동그랗게 뜨나 싶더니, 평소처럼 방긋거리며 미소 지었다.
"개최 시기를 생각하면 아직 시간은 있잖아. 그러니 그때까지 내가 이것저것 점검해 주마!"
강일의 미소를 본 갑환의 얼굴이 노래졌다. 입꼬리에 살짝 실룩실룩 경련을 일으키면서 그는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아닙니다, 충분히 지도받았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양하지 마라! 내가 조금만 더 가르쳐 주마."
"아닙니다, 스승님도 여기저기 다니셔야 하잖습니까!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이왕이면 전훈도 여기로 부르도록 할까? 그러면 더욱 의욕이 생길 텐데."
"정말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나무들 사이로 메아리쳤다. 봄바람조차 없애지 못하는 그들의 언쟁이 한동안 산속에 울려 퍼지면서 그곳에 사는 동물들을 떨게 만들었다.
산 위에는 어느새 비구름이 걷히고 맑고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오늘 수행은 여기까지다!"
"아, 네!"
쿠사나기 사이슈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정원에 울렸다.
그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야부키 신고는 움직임을 멈추고 폐에 찬 공기를 모두 토해내듯 숨을 내쉬었다. 수행이 끝났다는 걸 자각하자마자 모래 먼지와 진흙으로 잔뜩 더러워진 운동복에 땀이 스며들며, 형용할 수 없는 불쾌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신고는 놓여 있던 수건을 황급히 집어 들었다.
몇 발자국 떨어져 제자의 모습을 바라보던 사이슈는, 먼지투성이가 된 신고의 몸을 짐짓 바라보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신고...... 최근 몇 년 동안 제법 늘었구나."
이 자리에 야부키 신고라는 청년을 잘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사이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숨을 헐떡이기는 하지만, 지금 신고는 제대로 두 발을 땅에 딛고 서 있다. 예전 그였다면 땅에 쓰러져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수행량을, 지금의 신고는 어렵지 않게 소화할 수 있다. 매일 기초 훈련과 체력 증진에 투자한 그의 노력이 결실을 본 것이다.
"에헤헤...... 불꽃은 아직 한참 멀었지만요."
신고는 부끄러운 듯이 웃고는 진흙투성이 손가락으로 뺨을 긁었다. 말과는 반대로 목소리에서는 기쁜 기색이 흘러넘쳤다.
사이슈는 그런 모습의 신고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의 네 모습을 쿄에게 한번 보여주고 싶군. 그 녀석, 텅 노사의 의뢰를 다른 사람한테 떠넘겨 버리고선. 어디서 뭘 하는 건지......"
지난번 KOF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쿄는 좀처럼 집에 오지 않는 모양이다. 사이슈의 반응으로 보건대 삼신기로서의 사명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어쨌든 신고 개인적으로는 걱정되지만 수많은 국면을 극복해온 쿄에 대한 신뢰가 두텁기에, 결국 '방해하지 말자'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당연히 신고도 오랫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아마도, 쿠사나기가에 쿄뿐만 아니라 니카이도 베니마루와 다이몬 고로도 모여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간 그날이었는데......
문득, 신고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내 수행의 성과를 쿄 씨에게 전혀 보여주지 못했잖아?!"
잘 생각해보니, 그날 다이몬에게 수행의 성과를 보여주긴 했지만, 쿄와의 대련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련은커녕,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니 어쩌면 쿄가 그를 못 봤을 수도 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신고는 힘없이 고개 숙이며 어깨를 떨궜다. 사이슈에게 칭찬받았다는 기쁨은 어디로 갔을까,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이윽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었다.
"다녀왔...... 응?"
현관문을 열려는데, 우편함에 삐죽 튀어나온 봉투가 신고의 눈에 문득 들어왔다.
우편물을 깜박하고 안 가지고 들어갔나? 방금 배달됐다고 하기에도 어중간한 시간이다. 의심스러운 손길로 집으니, 그것은 마치 판타지 영화의 소품처럼 고풍스러운 봉랍이 찍힌 양피지 봉투였다. 구석에는 멋진 필기체로 받는 사람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유심히 보니 '야부키 신고'라고 적혀 있는 듯도 했다.
봉투를 휙 뒤집어 보니,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으음, 『KOF 특별 추천장』...... 트, 특별 추천장이라고!?"
서둘러 봉투를 열어 읽어보니, 그곳에는 야부키 신고를 특별 추천자로 KOF에 초대하고 싶다는 내용과 출전 조건이 기재되어 있었다.
"내가 KOF에 참가한다니......"
신고는 눈을 감고, KOF라는 단어에서 생각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존경해 마지않는 쿠사나기 쿄와 그 불꽃을 시작으로, 여러 격투가의 강렬한 기술과 능력, 그리고 커다란 3단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잠시 침묵이 지난 뒤, 신고는 창백한 얼굴로 후들후들 몸을 떨었다.
"아니지...... 겁먹지 말자, 신고!"
약한 마음을 털어내듯 자기 뺨을 때리고는, 신고는 봉투를 세게 쥐었다.
"이건 기회야. 대회에 나가 쿠사나기 씨에게 지금의 내 힘을 보여줄 기회라고! 그리고 대회 후에 쿠사나기 씨가 내게 가르침을 줄지도 몰라! 아니, '줄지도 몰라'가 아니라 주시겠지!"
자신을 향한 응원이 점점 강해지자, 조금 떨어진 집의 개가 우렁찬 목소리에 반응해 멍멍 짖기 시작했다. 금세 약한 마음을 멀리 밀어내고 자신의 눈에 활활 타오르는 열정의 불꽃을 담으며, 신고는 한적한 주택가의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우오오오오! 지켜봐 주세요, 쿄~~~씨!!"
이 직후, 현관에서 도깨비 같은 모습으로 뛰쳐나온 누나에게 슬리퍼로 맞은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 사무라이 팀 ──
시공의 틈새, 다른 차원으로 이어지는 균열 너머에서 제각기 손을 흔드는 동료들을 배웅한 후, 나코루루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시선을 떨구자 어슴푸레 빛을 뿜는 자신의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차원과 시공을 뛰어넘는 행위는 육체에 큰 부담을 준다. 차원이나 시공의 초월은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코루루는 육체라는 껍질에서 벗어나 영혼만 존재하기에 영향을 받지 않고 계속 여행할 수 있다.
나코루루에게는 성스러운 정령의 힘, 즉 동행자를 차원과 시공 초월의 악영향으로부터 지키는 힘이 있다. 하지만 그 힘에도 한계가 있기에 원래 세상으로부터 오래 떨어져 있을 수는 없었다. 나코루루는 여행 동료들을 각자 세상으로 되돌려 보내기로 결심했다. 친구와의 이별로 외로움을 느낄지언정 자신의 판단을 후회하진 않았고, 생사고락을 함께한 추억은 가슴속에 분명히 남았다.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을 지그시 바라보고는 단정한 얼굴에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꼭 사악한 신을 제거해야만 해. 이대로 두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잠시 눈을 감은 뒤, 결의에 찬 눈빛을 시공 너머로 보냈다.
그 시선 끝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이끌리듯, 나코루루는 눈에 확고한 의지를 품고 마치 매처럼 날아올랐다.
"큰 바다도 거뜬히 횡단할 듯한 튼튼한 배네……"
데지마 항에 정박한 큰 배의 갑판. 달리 대거는 나무통에 기대어 방금 들은 말을 곱씹었다. 선박공인 그녀는 간혹 다른 나라를 돌아보기 위해 훌쩍 여행을 떠나고는 했는데, 이번처럼 일본에 들를 때면 종종 즉흥적으로 아는 얼굴을 보러 가기도 했다.
오늘 밤, 손님으로 그녀 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남자도 '달리 대거가 항구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바람에 이끌리듯 배에 들렀다.
차곡차곡 쌓인 나무상자 위에 앉은 채 손에 든 술병을 기울이는 방랑 검사――하오마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탔던 배는 저번 큰 폭풍 때문에 부서졌거든. 이왕이면 예전보다 튼튼한 배로 여행하고 싶어. 달리, 너라면 만들 수 있지?"
달리는 하오마루의 무르팍에 놓인 찰랑찰랑한 술잔을 거침없이 손에 쥐고 단번에 들이켰다. 화끈하게 술잔을 비우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하오마루도 씩 웃었다.
달리는 나무통 위에 탁 소리를 내며 앉더니,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세게 쳤다.
"하, 지금 누구한테 하는 소리야? 내가 만든 배를 우습게 보면 곤란하지. 튼튼한 건 물론이고 일곱 바다를 몇 백 번 돌고 태풍에 천 번 휩쓸려도 바닥에 구멍조차 나지 않는다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히죽 웃는가 싶더니,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몸을 내밀었다.
"그런데 하오마루, 배를 주문하는 건 좋지만 돈은 있지? 술친구라고 배를 공짜로 만들어 줄 정도로 난 좋은 사람이 아니야."
"미안한데 지금은 돈이 없어. 당분간 굶지 않고 지낼 정도는 있지만, 큰 폭풍 때문에 빈털터리가 됐거든. 지금쯤 바다 아래서 물고기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있겠지."
하오마루는 씁쓸하게 어깨를 움츠렸으나, 달리의 미간 주름이 좀처럼 펴지지 않자 초조해진 모양이다. 쓴웃음을 짓던 그는 짐짓 표정을 바꾸고, 낮은 신음과 함께 얼굴 앞에 두 손을 착 모았다.
"……어떻게 안 될까? 이렇게 부탁할게!"
달리는 고개 숙인 하오마루를 잠시 바라보더니 훗 하고 웃음 지었다.
"어쩔 수 없네. 그럼, 우리 공방에서 한동안 일해줘야겠어! 머지않아 험악한 녀석들이 섬에 들른대서 모두 곤란해하던 참이거든. 나 혼자서도 어떻게든 할 순 있지만, 너까지 있으면 섬사람들도 든든해할 거야."
"고마워, 은혜 안 잊을게! 그나저나 네 고향에 들른 것도 오래간만이군. 말썽쟁이들은 잘 지내고 있어?"
"말썽쟁이들부터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두 잘 지내! 전에 네가 놀러 왔을 때랑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갑판에 울려 퍼지자, 멀리서 쉬던 뱃사람들도 덩달아 쾌활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그들이 밀려오는 파도 소리를 안주 삼아 다시 술잔을 주고받으려던 그때였다.
하오마루와 달리 바로 옆에 달빛을 모은 듯한 옅은 빛방울이 감돌았다. 야광충의 것도 아닌 그 빛은, 놀라는 두 사람 눈앞에서 하나의 점으로 모여 눈부시게 빛나더니 한 소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으앗?!"
무심코 눈을 가렸던 두 사람이 눈을 뜨자, 한 소녀가 빛방울들에 휘감긴 채 갑판 위로 내려왔다. 그녀는 청렴한 분위기가 감도는 긴 머리의 소녀――두 사람이 익히 아는 카무이의 전사, 나코루루였다.
"하오마루 씨, 달리 씨. 오랜만이에요."
하오마루와 달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소 짓는 나코루루를 바라보았으나, 금세 굳은 어깨에서 힘을 뺐다.
"별난 아가씨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허공에서 나타날 줄이야……"
"그래도 연막탄은 아니라 다행이네 . 그거, 가끔 나까지 들이마셔서 숨이 턱 막히거든."
근처의 나무상자를 가리키며 "아무튼 앉아."라고 달리가 말하자 하오마루는 근처에 뒀던 선물 중에서 나코루루의 입에 맞을 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 두 사람을 얌전한 시선으로 지그시 바라본 후 나코루루는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하오마루 씨, 달리 씨…… 부디 저와 함께 시공을 뛰어넘어 사악한 신을 함께 토벌해 주시겠어요?"
어안이 벙벙한 두 사람에게 나코루루는 사건의 전말을 차근차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에도 시대로부터 먼 미래에 『케이오에프』라는 격투 대회가 열린다는 것. 그 대회에서 발생한 투지와 기운을 흡수하여 재앙을 일으키려는 사악한 신이 존재한다는 것. 사악한 신 안에는 암흑신 암브로시아의 사악한 힘의 파편이 깃들었으며, 그것을 없앨 수 있는 것은 나코루루 뿐이라는 것. 여러 차원을 뛰어넘어 든든한 동료들과 함께 싸웠지만 아슬아슬하게 놓쳐버렸다는 것.
이야기를 전부 들은 나코루루는 조용히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기도하듯이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용히 이야기를 들은 하오마루는 관자놀이를 벅벅 긁은 뒤, 달리에게 눈짓을 했다.
"저기, 나코루루. 우리가 너한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하오마루는 나무상자에서 털썩 내려섰다. 마찬가지로 달리도 일어나서 근처에 세워뒀던 큰 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하오마루는 대담한 웃음을 지으며 달리 옆에 서서 허리에 찬 애도, 하돈독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 대회에 강한 녀석들도 나오지?"
두 사람의 이구동성에 나코루루는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손을 내밀며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이죠!"
정오가 지나 태양이 높이 떠오른 한가로운 한낮이었다. 광대한 자연공원의 한구석에서 산들바람이라고 하기에는 약한 공기의 흐름을 살갗으로 느끼며, 독서에 열중하는 한 남자가 있다. 목사 같은 옷차림을 한 남자는 평온한 표정으로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점심이 지난 공원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그러나 사람의 기척이 희박하기에 남자는 이 시간이 편안했다. 눈을 감으면 푸르고 울창한 나무들과 작은 새와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들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조금 불편한 몸이긴 하지만, 이렇게 자연의 멋진 분위기에 둘러싸여 독서를 즐기는 것이 이 남자의 현재 일과이며, 작은 휴식이기도 했다.
책상 위에 놓인 스마트폰 화면이 갑자기 빛나자 남자는 책에서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착신음으로 설정된 클래식 음악이 우아하게 흐르는 가운데, 남자는 통화 알림 아래에 표시된 연락처를 확인하더니 책에 책갈피를 끼우고 조용히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오랜만입니다. 당신이 연락을 하다니 드문 일이군요……잘 지내십니까?"
'그'는 다짜고짜 "너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은데."라는 말을 내뱉더니, 남자의 대답도 듣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
"검은 공간에 수수께끼의 균열…… 거기서 기어 나오는 무수한 손 말입니까."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남자는 턱에 손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황당무계한 악몽처럼만 들리는 내용이었으나 가벼운 말투와는 달리 그 음색이 진지했으며, 그 말의 구석구석에서――'그'치고는 드물게――희미한 동요가 느껴졌다.
먼 수풀에서 나무 열매를 찾는 작은 새를 시선으로 쫓으며, 남자는 조용히 대답했다.
"네, 저도 제 눈으로 봤습니다. 그 정체에 대해…… 제 추측을 듣고 싶으시다고요? 확실히 그 아이는 신중한 성격입니다. 미지의 존재를 경계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하지만 그 말을 그렇게까지 염려하다니, 당신답지 않군요."
남자가 웃음을 머금으며 지적하자, 그는 곧장 "바보 취급하는 건가."라며 화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와 '그'의 현재 관계는 서로를 전혀 모르는 타인처럼 가볍지도 않았으나 '그'의 동거인이나 친구처럼 깊지도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그 한 마디로 '그'의 표정을 역력히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후후. 당신과 셸미, 그리고 크리스…… 부활한 지 얼마 안 됐다고는 해도, 오만함을 버린 당신들 셋이 모이면 그 기우조차도 '사소한 일'이겠죠. 아닙니까?"
'그'의 짧은 신음이 들려온다. 전화기 너머로 '그'는 쑥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리고 있을 테다. 몇 초가 흐르고 작은 한숨이 섞인 "그렇겠지."라는 말이 들려왔다. 남자의 대답을 듣고 조금은 '그'의 마음이 편해졌는지, 아까보다 더 음성이 가벼웠다.
남자는 평온하게 미소 지으며 손에 든 책의 페이지를 괜스레 한 장 넘기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매츄어와 바이스는 야가미 이오리의 피에 매혹됐고, 야마자키 류지는 일족의 사명보다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길을 택했습니다. 레오나 하이데른은 본래 자신의 모습을 계속 외면하고…… 지금 오로치 일족의 사명에 충실한 자들은 오직 우리 오로치 사천왕뿐입니다.
하지만 그 또한 섭리일지도 모르죠. 우리는 오로치 일족이라는 '전체'임과 동시에 각자 의지를 지닌 '개체'이기도 하니까요. 저도, 셸미도 크리스도, 그리고 당신도……"
조용히 이야기하는 남자 옆으로 희미한 바람이 불었다.
"지구 의사 오로치가 한번 눈을 뜨면 모든 오로치 일족이 그 모습을 되찾겠죠. 레오나뿐만 아니라 야마자키 류지조차도…… 어리석은 인류가 멸망하고 평온과 활력을 되찾은 낙원…… 제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아까보다 더 강한 바람이 공원에 불었다. 나무들이 쏴아 소리를 내고, 풀숲에서도 나무 열매를 쪼던 새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날아갔다.
"이번 싸움이 설령 바라지 않은 결과로 이어진다 해도, 초조해할 필요는 없을 테죠. 우리는 그들과 달리 이렇게 생각할 시간이 있으니까요."
남자가 평온하게 말하자 '그'는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다. 목소리가 끊기자 스피커 너머로 차가 오가는 엔진음과 지나가는 사람들의 웅성거림까지 선명히 들려왔다. 분명, 남자 옆에 있는 나무의 이파리가 스치는 소리, 옆을 지나가는 바람과 멀리서 솟아오르는 분수 소리까지'그'의 귀에 들리고 있을 터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의 물음에 남자는 살짝 눈썹을 추켜올렸다.
"……앞으로의 제 활동 말입니까?"
남자는 책에서 시선을 들어, 몇 그루의 나무와 담장을 사이에 둔 저 너머――이리도 평화롭게 지기와 통화하는 모습까지 심각한 표정으로 노려보는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모자를 깊이 눌러쓴 그 남자는 초조한 듯 신문을 읽는 척 얼굴을 가렸다. 아마도 당황해서 인캠 너머의 상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을 것이다. 몇 시간 후에는 모른 척 다른 사람과 교대할 것이 뻔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알아서 즐길 테니까요……"
그 대답에 내포된 의도를 이해했는지 '그'는 납득했다는 듯 말하고, 평소처럼 바싹 마른 목소리로 "그래, 알았다."라고 대답했다.
모든 것은 오로치를 위해――그 한마디를 남자에게 말하자, '그'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었다.
다시 조용해진 나무 아래서 『통화가 종료되었습니다』라고 표시된 화면을 내려다보고는, 남자는 만족스럽게 눈웃음 지으며 스마트폰의 전원을 껐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서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쏴아 하고 한바탕 불어온 바람이 남자의 몸을 감싸듯이 지나갔다. 지면을 가만히 누르고 있던 남자의 손가락을 밀어내듯이 책장이 팔랑팔랑 소리를 내며 넘어가 이야기가 자연스레 진행됐다.
잠잠해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그들은 이렇게 현세에 되살아났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하늘만이 알 것이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이 아니라 신앙이다.
지금은 먼 곳에 있는 동포들에게 기도를 올린 뒤, 그 남자――게닛츠는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으며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바람이…… 불어오는군요."
사우스타운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기스 타워 고층에 자리한 어느 방. 제왕의 관록을 풍기는 기스 하워드는 창문 밖에 펼쳐진 호화찬란한 야경을 의자에 앉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지배하는 도시를 희열에 찬 표정으로 바라보는 기스 옆에서, 그의 오른팔인 빌리 칸이 자료에 시선을 떨어트렸다.
빌리가 손에 든 자료에는 하이데른 부대에게 첩보 받은 여러 데이터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 대부분이 지난번 KOF에서 모습을 드러낸 수수께끼의 괴물, 버스에 관한 조사 자료이며, 이번에도 버스의 재래를 예견하는 듯한 보고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하이데른 놈들이 '버스'라고 부르는 그 괴물…… 기스 님도 녀석이 이번에야말로 완전체가 되어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빌리가 물어보자 기스는 소리 없이 미소 지으며 긍정했다.
"그래. 하지만 빌리, 다음에는 그것보다 재밌는 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아……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버스는 단지 시작에 불과해. 때가 무르익은 지금이야말로 그건……"
기스의 말이 끝나기 전에 조용한 방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빌리는 접객용 소파에 앉은 남자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웃음의 주인은 오만불손한 표정을 유지한 채, 더욱 도발하듯 눈앞의 낮은 테이블에 발을 올렸다.
"크크큭…… 일부러 거금을 들이대며 뭘 의뢰하나 했더니, 질리지도 않고 새로운 괴물을 구경하는 건가? 여전히 취미 고약한 영감이군."
그렇게 말하고는 야마자키 류지는 기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악의에 가득 찬 도발까지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기스 옆에서, 빌리는 주인에 대한 무례를 참을 수 없다는 듯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네놈, 뭐라고 했지……?"
빌리가 손에 쥔 봉으로 가볍게 바닥을 치자 야마자키는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봐 애완견, 시시한 일로 물어뜯지 말라고. 아니면 뭐냐? 주인님 앞에서 두 번 다시 물어뜯지 못하게 될 정도로 박살 나고 싶냐? 어?!"
야마자키의 조소 섞인 이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건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살의가 담긴 살무사 같은 시선을 보내는 야마자키를 향해, 빌리 역시 살의를 숨기지 않고 봉을 쥐었다.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서 입구에서 대기하던 리퍼와 호퍼가 무심코 마른침을 삼킨 그때였다.
"두 사람 모두 그만하시죠."
두 사람 사이에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끼어든 건 하워드 커넥션의 신입―― 하인이었다. 그는 빌리를 향해 한쪽 손을 들어 올려 저지하고는, 반대편의 야마자키를 바라보았다.
"야마자키 님. 당신에게 의뢰한 것은 저를 대신해…… 'KOF에서 기스 님과 동반하며 호위하는 일'입니다. 계약금은 이미 지급했으니, 계속 충돌을 일으키는 언동을 반복하신다면 동반 거부…… 나아가 계약 위반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온화한 말투였지만 하인의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갑다. 보통 사람이라면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시선이었지만, 그렇게 째려봤다고 해서 한번 불이 붙은 야마자키 류지라는 남자가 물러설 리 없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쳇, 시끄러운 녀석이군……"
이렇게 말하고는 야마자키는 시시하다는 듯 욕을 내뱉고는, 일어서려다 말고 다시 소파에 궁둥이를 붙였다.
덩달아 긴장이 풀린 빌리는 무장을 해제하며 기스에게 물었다.
"기스 님…… 야마자키를 고용한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신입을 데려가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엇이죠?"
"걱정 마라. 내 명령이다."
기스는 너그럽게 웃더니, 한발 물러서 창가에 서 있는 하인을 보았다. 그의 시선과 마주친 하인은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여러분이 안 계시는 동안, 외람되지만 제가 도시의 청소를 맡게 되었습니다. 부디 안심하십시오…… 여러분이 돌아오실 때쯤에는 기스 님의 부재를 노린 쓰레기를 제가 모두 정리해 둘 테니까요."
하인의 설명에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굳이 위화감이라고 한다면, 신입치고는 기스에게 과하게 신뢰받는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하워드 커넥션에 발탁된 이후 하인의 활약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인지, 리퍼와 호퍼는 납득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빌리만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문득 리퍼가 손목시계를 보며 기스에게 말했다.
"기스 님, 이제 슬슬……"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군. 하인, 손님을 밖까지 배웅해 드려라."
기스는 그렇게 명령하고는 조용히 의자를 회전시켜 야마자키와 하인에게 등을 보였다.
"알겠습니다."
"받은 돈만큼 협력하겠지만, 네놈의 부하 놈들에게 지시받을 생각은 없다. 나는 내 멋대로 즐기겠어, 기스 하워드!"
우아하게 인사하는 하인과는 반대로 야마자키는 입꼬리를 올려 거칠게 웃더니, 코트를 휘날리며 느긋하게 방 밖으로 걸어갔다. 하인은 그가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본 후에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나간 것을 보고 빌리는 다시 기스를 향해 인사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래."
주인의 대답을 듣고 빌리는 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 양옆에 대기하던 동료 두 명을 스쳐 지나가면서 속삭였다.
"저 신입에게서 눈을 떼지 마."
리퍼와 호퍼는 얼굴을 마주 보고는 빌리를 뒤따랐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정적이 방을 감쌌다. 숨을 한 번 내뱉은 후 기스는 의자에서 떨어져 유유히 창가로 다가갔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반짝반짝 빛나는 사우스타운의 야경은 마치 검은색 천에 보석을 흩뿌린 듯 아름다웠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이 도시에 발을 들이고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여태까지 아무도 그 야망을 실현하지 못했다.
――지금, 이 도시를 내려다보는 이 남자를 제외하면 말이다.
"때가 되면 비전서 속의 마물이 군림한다……? 하지만 그것도 시작에 불과해."
사우스타운에 사는 군상들을 내려다보며 기스 하워드는 미소 지었다.
"암여우에 살무사라…… 이 도시의 이매망량을 포섭하고자 하는 그 야망, 싫지는 않군. 네가 준비한 이 희극이 내 지루함을 달래기에 충분한지 똑똑히 확인해 주지."
사우스타운의 한 구석, 매우 평범하고 저렴한 아파트의 어느 방.
정오를 넘긴 햇볕이 창가로 쏟아지는 풍경 속, 소파에 느긋이 걸터앉아 레트로 게임의 컨트롤러를 꼭 쥔 테리 보가드와 부엌 청소를 끝내고 앞치마를 세탁 바구니에 던져 넣는 락 하워드의 모습은 서로에게 아주 일상적인 휴일의 광경이었다.
화려한 팡파르와 함께 텔레비전 화면에 "CONGRATULATIONS"이라는 표시가 나타나자 테리가 저도 모르게 승리 포즈를 취했고, 그와 동시에 그의 등 뒤에서 낡은 선반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락은 들고 있는 재킷의 소매에 팔을 집어넣으며 양아버지를 돌아보았다.
"테리, 잠시 나갔다 올게."
"응? 여자친구랑 데이트 가냐?"
기분 좋은 미소 그대로 돌아보는 테리의 농담에 락은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놀리지 마. 잠시 볼일이 있을 뿐이야."
"그러냐. 너라면 괜찮겠지만 문제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해라."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는 테리에게 락도 미소로 답했다. 그는 락을 어린애 취급하는 게 아니었다. 가족으로서――비록 혈연관계는 아닐지라도――소중히 여기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런 양부의 존재는 락에게 동경이자 따뜻한 양지 그 자체였다.
"테리는 앤디 씨 일행과 만난다고 했나?"
"그래, 죠가 만나자고 해서 말이다. 이참에 파오파오 카페에서 밥이라도 먹자는군."
테이블 위에 놓인 집 열쇠와 스마트폰을 집어 들면서, 락은 다시 TV를 마주한 테리의 등에 대고 말했다.
"그럼 저녁 식사는 필요 없겠네. 나도 먹고 올게."
대답 대신 팔랑팔랑 흔드는 손을 확인한 뒤, 락은 집을 나섰다.
아파트에서 벗어나 낮의 사우스타운의 메인 스트리트를 걸으며, 락은 스마트폰으로 전송된 메시지 한 통을 다시 확인한다.
"문제에 휘말리지 마라......"
메일을 보낸 사람은 의적 리린나이츠――그 리더인 B.제니라는 여자였다. 몇 번 얼굴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녀의 인상은 악인과는 꽤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선인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런 그녀가 보낸 메일의 제목은 매우 간결했다.
『KOF를 위한 팀 결성 제안♡』
락은 스마트폰을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해, 테리."
베이 에리어에 조용히 자리한 그 식당은 잡지에 실릴 정도로 유명하지는 않지만, 근처 주민들과 트럭 운전사들이 꾸준히 다닐 정도로는 인기 있는 가게다. '아는 사람만 아는'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세월의 때가 적절히 묻은 가게의 풍모에 이끌려 배낭 여행객들이 심심찮게 발길을 옮기지만, 가게 구석의 박스석에 앉은 남녀의 분위기는 즉흥적으로 들어온 여행객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가토 씨. 당신과 한 약속은 '당신 아빠의 종적과 정보 수집'......이었지."
기분 나쁜 듯 미간을 깊이 찌푸리고 팔짱을 낀 건 가토라고 불린 남자 권법가였다. 그에 비해 밝은 미소를 유지하며 일방적으로 떠드는 쪽은 드레스 차림의 젊은 여자였다.
한눈에 봐도 사연이 있음 직한 두 사람에게 다가가려는 손님이나 점원은 없었으나, 그와 동시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존재라는 점도 명확했기에 손님 중 몇 명은 신문을 읽으며 힐끗힐끗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런 시선이 거슬렸는지 가토가 날카롭게 노려본 이후에는, 그 호기심이 목숨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고 모두 모르는 척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
"오래 기다리게 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그만큼의 성과는 있었어."
돌고래 스트랩이 달린 USB 메모리를 들어 얼굴 옆에서 흔들며, 금발의 여성――B.제니는 눈을 깜빡이며 윙크한다. 가토는 자리에 앉은 후 시종일관 감고 있던 눈꺼풀을 처음으로 들어 올리더니, 날카로운 시선으로 USB 메모리를 바라봤다.
"당신 아빠의 정보는 확실히 이 안에......"
"어서 넘겨."
가토가 손을 내미는 것보다도 빠르게 제니가 USB 메모리를 쥔 손을 거뒀다. 갈 곳을 잃은 가토의 손가락이 허공을 가르고, 그와 동시에 미간의 주름이 점점 더 깊어진다.
"아직은 안 돼!"
"......무슨 속셈이냐."
"조사에 전면적으로 협력하겠다고 했지, 정보를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말은 한 적 없어."
"이 녀석이!"
사우스타운의 불량배들조차 맨발로 도망갈 법한 모습으로 성내는 가토가 그녀를 노려보지만, 제니는 주눅 들지 않는다. 오히려 여유를 잃지 않고 얼굴 옆에서 손가락을 틱틱 흔들었다.
"폭력은 노노! 걱정하지 않아도 이 정보는 당신에게 확실하게 넘길 거야. 보상......으로 말이야."
"보상이라고?"
짜증보다는 궁금증이 더 강했을까? 가토의 표정이 약간 풀어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제니는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신들'이 협력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거든."
의미심장한 그녀의 말에 가토가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뗀 그 순간.
바닷바람에 살짝 녹슨 문이 큰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제니가 고개를 들더니, 입구에서 가게 안을 둘러보는 락 하워드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여기야!"
목소리를 들은 락은 제니 일행이 있는 박스석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쓴웃음으로도 불신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표정을 지으며 그는 제니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제니가 안쪽으로 옮겨 좌석을 손으로 두드리자, 그는 어색하게 옆에 앉아 험상궂은 얼굴의 가토와 미소를 띤 제니를 번갈아 바라봤다.
"메시지는 봤는데, 그러니까...... 여기 있는 사람이 팀 멤버란 말이야?"
"팀이라고......? 이 녀석이――"
"그래 맞아. 핸섬 보이는 이해가 빨라서 다행이네~!"
가토가 분노를 담은 목소리를 내기 전에 제니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가토를 힐끗 흘겨보았다. 그 시선은 명백하게 "얌전히 있지 않으면 일이 더 꼬일 거야."라고 호소하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무모하게도――가토라는 남자에게 무언의 압박과 강제를 가하는 눈초리이기도 했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눈치 못 챘겠지만, 사실 그녀 목덜미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가토는 살기 어린 시선으로 잠시 제니를 노려보았으나, 포기했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제니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바로 그릇으로 어질러진 테이블 위를 척척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려한 실링 왁스가 찍힌 봉투를 그 위에 놓았다. 서민적인 식당에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띤 세 통의 봉투에 자연스레 시선이 집중됐다.
"짠! 이게 초대장이야."
제니가 말하면서 팔을 벌리자, 그와 동시에 가토가 테이블 위의 초대장을 한 통 집어 들었다. 말도 없이 일어선 가토는 그대로 초대장을 찢어버리고 락과 제니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지금은 그 농간에 넘어가 주마...... 돈도 필요하다면 주겠다. 그러나 만약 거래가 흐지부지된다면 네놈의 목숨은 없을 줄 알아라......!"
그는 우두둑 주먹을 쥐면서 제니에게 이렇게 내뱉더니, 성난 기색을 감추지 않고 거칠게 식당 출입구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제니는 그의 등 뒤에서 "약속은 지킬게!"라고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의아하게 쳐다보는 락에게 시선을 옮겼다.
"까다롭지만 실력은 확실한 사람이야."
"까다로운 게 문제인가? 멤버 간에 문제는 없었으면 하는데?"
"걱정하지 마! 이야기는 다 잘됐으니까 신경 쓸 것 없어!"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대답에 락은 점점 더 불안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뭐, 그래도 그는 저런 스타일이잖아? 그래서 처음에는 그리짱에게 제안하려고 했어. 촐싹......이 아니라, 친절하고 분위기 메이커니까. 하지만 사무소에 연락해도 이적했다느니 뭐니 하며 연락이 안 되더라고. 그래서 눈에 들어온 게 당신이었어, 락 하워드♪"
낭랑하게 이야기하는 제니를 곁눈질하며 락은 테이블에 막 서빙된 커피를 마셨다. 제니의 이야기가 일단락될 때쯤 그는 머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의아한 듯이 물었다.
"또 신경 쓰이는 점이 있는데, 어째서 나야? 당신에게는 내가 응할 거라는 확신이 없었을 테고, 좀 더 끌어들이기 쉬운 녀석도 있었잖아."
질문받을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는지, 제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락의 얼굴을 찬찬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불편하다는 듯이 락이 얼굴을 돌리자, 그녀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밝게 웃어 보였다.
"음, 좋은 질문이야. 먼저 첫 번째 이유는 간단해. 당신이 멤버라면 분명 승산이 있다고 여자의 감이 말해줬거든! 그리고 두 번째는...... 절대로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는걸? 왜냐면 테리 보가드와 화려한 무대에서 싸울 기회를 당신이 놓칠 리 없잖아."
이번에는 락이 눈을 동그랗게 뜰 차례였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깔끔하게 핵심을 찔리면 웃음이 나오는 법이라, 락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웃음을 흘렸다. 그런 그의 모습에 제니도 빙긋 웃었다.
"당신도 지난번 KOF에서 벌어진 해프닝에 대해선 알지? 나는 말이야, 이번에도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주시하고 있어."
"그것도 감인가?"
"맞아! 지루할 틈이 없을 거 같지 않아? 당신은 테리 보가드와 싸울 수 있고. 나는 KOF를 잔뜩 즐길 수 있잖아. 서로 윈윈인 거지♪"
제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테이블 위의 봉투를 집어 들어 락에게 내밀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녀는 장난스럽게 윙크하더니, 비어 있는 한쪽 손으로 어깨에 걸친 자신의 머리를 넘겼다.
"그럼 오늘부터 우리는 같은 팀이네! 잘 부탁해, 락 하워드."
락은 봉투를 받고 그녀에게 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이슬라는 철이 들었을 때부터 아동 보호 시설의 담장 안에서 생활했다.
고아, 버려진 아이, 다양한 사정이 있었지만 이 시설에 들어온 아이들에겐 밖에서 지낼 곳이 없다. 시설 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는 그녀 또한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이슬라는 자신이 버려진 이유를 어슴푸레 짐작하고 있었다.
이슬라에게는 다른 아이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눈앞에 있는 물건을 움직이고 싶다고 상상하면 상상대로 물건이 움직이고, 작은 물건 정도는 공중에 띄우는 일도 가능했으며, 생각만 해도 만지지 않고도 파괴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는 늘 그녀의 주위에 숨어 이슬라의 마음을 헤아려 주었다. 잠이 잘 오지 않는 밤에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고, 넘어질 뻔하면 몸을 지탱해 주었다.
자신만 느낄 수 있는 그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이슬라는 '아만다'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차츰 성장하면서 '무언가'를 가진 자신이 이상하고, 가지지 않은 주변 사람들이 평범하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부모님이 자신을 버렸다는 것을 깨달을 정도로 그녀는 영리했다.
누군가의 충고를 들을 필요도 없이, 이슬라는 '아만다'를 비밀로 하기로 했다. 이슬라의 보이지 않는 친구는 어린아이가 하는 공상 정도로 주변 사람들의 기억 속에 풍화되었고, 이슬라가 일곱 살이 될 무렵에는 모두가 잊었다.
"너희보다 더 불행한 아이는 세상에 널렸다."
"여기서 지낼 수 있는 걸 감사히 여겨라."
조례에 모인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언제나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회색 담장으로 둘러싸인 이 시설에서는 어른 말을 잘 따르는 아이는 좋은 아이이고, 말을 듣지 않는 아이는 나쁜 아이다. 어른들의 기대에 맞게 자란 아이가 우수하고, 그렇지 않은 아이에게는 열등생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우수한 아이들은 어른들이 소개하는 직장에 취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무일푼으로 담장 밖으로 쫓겨난다―― 어른들의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 수 없지만, 그 협박 문구를 들을 때마다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우수하고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결의를 다졌다.
아이는 어른이 정한 시간표에 따라 수업을 듣고, 몸을 움직이고, 식사하고, 잠을 자는 담담한 일상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공용 휴게실에 놓인 텔레비전으로 시설의 높은 어른의 메시지는 들을 수 있었지만, 그 화면에 오락 영화나 애니메이션이 나오는 일은 결코 없었으며, 벽 밖에서 튀어 날아 들어온 공 하나까지 어른들은 아이들에게서 빼앗았다. 오락은 인간을 나태하게 만드는 독이다. 이것이 어른들의 입버릇이었다.
그런 생활을 하던 열두 살의 여름, 이슬라는 자신의 '취미'를 발견했다.
계기는 나이 어린 소년에게 강아지 그림을 그려준 일이었다. 사진을 떠올리면서 그린 서투른 개 그림을 보고 크게 기뻐하는 소년을 보자 기분이 좋았고, 그다음엔 고양이, 물고기, 새 등 다양한 것들을 그려 보았다. 동물, 꽃, 방 안의 자질구레한 물건, 모두의 초상화―― 그렇게 이슬라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는 어른의 눈을 피해서 버리는 종이의 뒷면, 훔친 시트 위, 선반 뒤의 벽면 등 다양한 장소에 여러 그림을 줄기차게 그렸다. 때로는 '아만다'의 힘을 슬쩍 빌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날, 시설의 직원 한 명이 이슬라의 그림을 발견했다. 해가 뜨기 전인데도 아이들을 때려 깨운 후 서랍 안, 침대 뒤까지 뒤집어 그녀가 그린 그림을 모조리 찾아냈다. 이슬라가 아무리 '그만둬'라고 외쳐도 직원들은 듣지 않았고, 아이들은 모두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기가 가지고 있던 그림을 차례차례 어른들의 말에 따라 불태웠다.
"이딴 건 너희에게 필요 없다."
정원에 피운 불 앞에서 그 직원은 차가운 말을 쏟아냈다.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취미도 오락도 아닌 공부다. 성적이 항상 우수하고 어른을 힘들게 하지 않는 착한 아이가 되는 일이지. 그렇지 않아? 응? 대답은?"
"......"
겁에 질려 이슬라의 몸이 굳어지려 하자, 남자 직원은 상관없다는 듯이 손에 쥔 채찍을 위압적으로 휘둘러 소리를 냈다.
"입 다물고 있으면 용서해줄 거라고 생각해? 불쌍한 너희를 이만큼이나 키워준 게 누군데!"
입을 다문 이슬라를 노려보면서 그는 채찍 손잡이를 꽉 잡고 팔을 들어 올렸다.
내려친 채찍이 눈앞에 다가온 그 순간, 지금까지 억누른 인내심과 쌓여온 감정이 이슬라의 가슴 속에서 끓어 올랐다.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을 버린 부모, 아이를 제멋대로 복종시키려는 난폭한 어른들, 자신을 대하는 그들의 부조리한 태도에 대한 격렬한 증오였다.
"......웃기지 마......"
이슬라가 어금니를 꽉 깨문 것과 동시에 '아만다'가 공중에서 채찍 끝을 잡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채찍을 잡아당긴 바람에 직원이 그대로 자세를 무너트리며 넘어졌고, 그는 이슬라의 모습을 경악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감정에 호응하듯이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아만다'의 모습이 천천히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선명한 보랏빛에 테두리가 있는 '손'이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바라보았다.
"뭐, 뭐야 저건......!?"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짜내며 남자 직원은 '아만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뿐만 아니라, 멀찍이 둘러싸고 바라보던 다른 어른들, 그리고 같은 방에서 지내던 아이들까지 기이한 시선으로 이슬라와 '아만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이슬라는 화가 나 있었다.
"불쌍하다느니, 평범하다느니, 필요 없다느니 네놈들의 형편에 맞춰 멋대로 정해버리고......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슬라가 한 발자국 내딛자, 그는 엉덩이를 질질 끌고 도망치려 했다. 그런 남자의 옆구리를 재빨리 아만다가 잡아 올려 허공에 매달았다. 회색 벽을 뒤로 하고 공중에서 꼴사납게 발을 파닥거리는 모습을 번뜩이는 눈으로 노려보며, 이슬라는 천천히 앉아 다리에 힘을 주었다.
"네놈들이 말하는 '좋은 어른'이 될 바엔......"
강하게 지면을 박차고 올라, 이슬라는 남자의 복부를 향해 발길질했다.
"나는 평생 아이로 살겠어!"
남자의 명치에 발뒤꿈치가 깊숙이 들어갔다. 그 기세를 이용해 이슬라는 남자의 몸에 뛰어 올라갔다. 공중으로 높게 뛴 이슬라는 회색 벽 너머의 경치를 처음으로 바라보았다.
산 너머에서 내리쬐는 아침 햇빛이 하늘에 연한 핑크 그라데이션을 그렸고, 형형색색의 멋진 지붕이 그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끝없이 사방으로 펼쳐진 바다, 화려하고 현란한 세계에 이슬라는 마음을 빼앗겼다.
남자 직원이 내동댕이쳐지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더니, 이슬라의 앞에 날아온 '아만다'가 그 거리를 가리켰다. 함께 가자―― 목소리가 없어도 친구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이슬라는 '아만다'를 향해 미소 지으며 작게 끄덕였다.
"응, 가자...... 아만다!"
그날 아침, 이슬라는 한 쌍의 '손'과 함께 회색 벽으로 둘러싸인 아동 보호 시설에서 뛰쳐나왔다.
열두 살의 여름, 시설을 뛰쳐나온 그날 이후 이슬라는 아만다와 함께 평화롭게 살고 있다.
친척도 의지할 사람도 없었지만, 의외로 어떻게든 일이 풀려 지금은 시장과 음식점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번 돈으로 그림 도구를 구매해 거리에 작품을 그리고 있다.
거리에 그림을 그리는 이슬라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들 사이에 소문이 났고, 신기해하며 구경하러 온 비슷한 나이대의 소년 소녀들과 매우 친해졌다. 친구 한 명이 SNS 홍보를 제안해준 뒤로는 아티스트 활동도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림 도구를 살 돈도 그렇게까지 궁하지 않다.
한 번, 함께 살던 아이들이 궁금해서 아동 보호 시설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시설 어른들은 이슬라를 다시 데려오려 하진 않았으나, 아이들에게 맛있는 과자를 주라며 건넨 돈을 거만하게 움켜쥐더니 그걸 끝으로 소식이 없었다. 아마도 벽 안에 있는 아이들에게는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시설에서 나온 이슬라를 주위 어른들은 불량소녀라며 뒤에서 손가락질했지만, 착한 동년배 친구들은 이슬라의 취미도, 아만다에 대해서도 바보 취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녀의 장점이자 개성으로 생각해주었다. 그들에게 이슬라의 그림은 자유의 상징이었으며 그녀의 그림 아래가 아이들만의 편안한 아지트였다.
"이슬라와 아만다, 이렇게 잘 나가니 다른 나라에서도 활동해보면 어때?"
막 완성한 그라피티 밑에서 이야기하는 친구들의 말에, 이슬라는 부끄럽다는 듯이 웃었다.
"뭐, 해외에서 일해보고 싶긴 해."
"어떤 이벤트에 참가해서 연줄을 만든다든지, 지명도를 올려서 오퍼를 기다려 보면 어떨까?"
"그러고 보니, 이슬라와 아만다는 싸움도 잘하잖아? 이런 데 나가 보는 건 어때?"
"응? K, O, F......?"
친구가 내민 스마트폰에 비친 것은 격투 대회 중계 영상이었다. 이슬라는 의아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고 영상을 바라보다가―― 거기에 비친 소년의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헤드폰을 쓰고 세련된 중국 권법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그 소년. 그의 팔에 때때로 겹쳐지는 거대한 '손'이 낯이 익었다. 색깔도 크기도 다르지만, 아만다와 똑같다는 것을 이슬라는 직감했다.
"이 녀석의 이거, 이슬라와 아만다 같잖아."
"아만다랑은 다르지 않아? 아만다보다 크잖아."
"우와, 굉장해...... 땅바닥을 깬 거야? 무시무시한 파괴력이네."
"슌에이라는 아이래. 우리와 비슷한 나이인데 굉장해."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며 제각각 감상을 이야기하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이슬라의 귀에 울려 퍼졌다.
화면 너머에서 상대를 제압하는 소년의 모습. 그런 소년에게 달려가는 남자아이, 소년을 걱정하는 다정한 노인. 어른들이 어깨를 두드리자, 머리카락을 빙빙 잡아 돌리며 귀찮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아주 싫진 않은 표정으로 얼굴을 드는 소년은 참 행복해 보였다.
――축복받았잖아, 나와는 다르게.
한순간이지만 머릿속을 스친 그 감상조차 마음에 들지 않아, 이슬라는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친구들에게서 멀어졌다.
"......저런 녀석이 뭐가 굉장하다는 거야. 화려해 보이는 것뿐이잖아. 나와 아만다가 더 강하다고"
친구들은 순간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맞아!"라며 밝게 웃었다. 그리고 그들은 평소처럼 얼굴을 맞대고 부모와 학교에 대한 푸념과 불만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시 새로운 벽을 마주하고 이슬라는 모자챙을 푹 눌러썼다. 방독면으로 덮은 입가가 딱딱히 굳어있다는 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두고 봐, 날려 버릴 테니까."
슌에이는 전후좌우도 분간이 안 되는 어둠 속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여기는...... 뭐야? 어디지?"
슌에이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가, 울려 퍼지기 전에 사라졌다. 공간을 더듬어보려고 팔을 뻗자, 물속에 떠 있는 것처럼 엉뚱한 방향으로 몸이 부유할 뿐이다.
어둠, 어둠, 어둠―― 빛이 전혀 없음에도 자신의 몸만은 확실히 보였다. 그러나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메이텐? 할아버지?"
입 밖으로 소리를 내도 대답은 없다. 귀가 아파질 것 같은 정적 속에서 고독과 공포가 점점 속도를 더해갔다. 초조해 하며 발버둥 쳐도 몸이 둥둥 회전하는 감각밖에 없었다.
호흡이 흐트러지고 심장이 경종처럼 울려댔다. 슌에이 안의 고독과 공포가 한계를 맞이하고, 감정이 분출해 절규하려고 입을 연 그 때였다.
빠직.
어둠 속에서 소리가 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슌에이의 눈앞에 '균열'이 나타나 있었다.
균열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어둠 위로 퍼져갔다. 흡사 거미집처럼 퍼지는 하얀 균열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자니 중심이 비틀거리며 무너졌다.
"......?"
한 조각을 시작으로 균열의 중심이 빠직빠직 차차 무너져갔다.
그 안쪽에서 보이는 것은 무수한 빛이 깜빡이는 세계였다. 그곳은 마치 은하 같으면서도 이 세계의 이치에서 벗어난 이질적인 느낌의 공간이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저 너머의 세계. 그 광경에 슌에이는 어쩐지 그리움을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그 광경으로 손을 뻗자, 갑자기 이명이 그를 덮쳤다. 삐걱삐걱 새된 소리로 울리는 이명에 슌에이는 얼굴을 찡그렸으나, 시간이 지나자 그것이 '목소리'임을 깨달았다. 뭐라고 말하는 건지 알아듣기 위해 슌에이는 소리에 집중했고, 메시지를 확실하게 들었다.
"――모조리, 파괴해라."
'목소리'의 의도를 이해한 순간, 슌에이는 온몸에 오한이 몰려왔다. 머릿속, 슌에이의 깊은 곳에서 강력한 힘이 넘실거리는 것을 느꼈다. 고독, 공포, 절망, 슬픔, 분노―― 극한에 달했을 때 끓어오르는 감정처럼, 무서운 충동이었다.
"그...... 그만둬......!"
귀를 막으려고 올린 손이 허공을 질렀다.
"너는, 파괴의 힘. 분노해라. 슬퍼해라. 두려워해라. 무서워해라. 모조리, 파괴해라."
균열 너머로 무언가 보였다. 구체 같기도, 상자 같기도, 사람의 형체 같기도 한 무언가가.
"시끄러워, 닥쳐......!"
"파괴해라"
"으, 아...... 아......!"
'목소리'가 뇌 속을 쿵쿵 뒤흔들었다. 뇌 속에서 충동이 날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공간에서 그는 고독했다. 그 사실이 공포를 더 고조시켰고, 겁을 먹고 작아진 마음은 충동으로 뒤덮였다.
고통이 슌에이를 집어삼키려 한 찰나, 균열 안쪽에서 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빨간색과 파란색의 거대한 '손'이 나타나 슌에이의 몸을 거세게 들이받았다――
"――헉! 허억...... 허억......"
슌에이가 눈을 뜨자, 익숙한 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거친 호흡을 진정시키며 몸을 일으키자 걱정스러운 표정의 메이텐쿤과 눈이 마주쳤다.
"슌...... 괜찮아? 어제보다 더 심하게 가위눌렸어."
불안한 듯 베개를 끌어안는 메이텐쿤의 말을 듣고, 슌에이는 멍하니 손을 내려다보았다.
철이 들었을 때부터 이미, 슌에이는 이 악몽을 꾸고 있다.
처음에는 암흑 속을 영원히 떠다닐 뿐인 꿈이었다. 그저 그뿐이라면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꿈속에서 느끼는 공포와 고독은 어린 슌에이의 마음을 심하게 동요시켰다. 악몽에서 느낀 불안을 현실까지 끌고 오면 힘이 폭주하여 슌에이의 손은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슌에이에게 '자신의 힘을 억제하는 이미지를 쉽게 떠올릴 수 있도록' 헤드폰과 붕대를 준 사람이 바로 스승인 텅푸루였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악몽의 내용이 변했다. 어둠 속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균열은 날이 지날수록 점점 커져갔지만 텅의 가르침, 이미지를 통한 감정 조절의 성과, 그리고 무엇보다 슌에이 자신의 성장으로 일상에 지장을 끼치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이렇게까지 밤에 가위눌리는 일은 없었다.
메이텐쿤의 말로는, 슌에이가 가위에 눌리게 된 건 바로 최근의 일로―― 지난 대회에서 수수께끼의 괴물과 대면한 다음 날부터였다고 한다.
슌에이가 꿈속의 광경에서 기억하는 것은 균열이 끝까지 퍼진 부분까지였다. 그 이후의 일들은 눈을 뜨면 모두 잊어버렸다. 그래서 악몽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 괴물과 관련이 있는지조차 메이텐쿤과 텅푸루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지독한 고통을 느낀다는 점. 무슨 수를 써도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게 된다는 점뿐이었다.
"KOF에 출전해서 조금은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상태라면......"
아침 단련을 끝내고 산 중턱에 있는 약수터에서 얼굴을 씻으며 슌에이가 이렇게 중얼거리자, 메이텐쿤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약해지면 안 돼~ 슌. 그리고 만약 슌이 옛날처럼 폭주해도 나와 선생님이...... 아니, 우리뿐만 아니라 테리 씨도 앤디 씨도 쿄 씨도 있잖아......"
메이텐쿤은 손가락을 꼽으며 말하다가 도중에 세기를 그만두고 크게 팔을 벌렸다.
"다 같이 어떻게든 할 테니 안심해!"
슌에이는 잠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갑자기 긴장이 풀린 것처럼 웃었다.
"그렇네. 고마워, 메이텐."
"에헤헤~ 기대되는걸."
주먹을 탁 맞부딪히고는 두 소년은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주위 산에 낀 옅은 구름이 아침 햇살을 받아 아련한 분홍빛으로 물들어갔다.
"뭐, 폭주할 생각 따윈 전혀 없지만."
"그래 맞아~ 그러려고 열심히 수련했잖아, 슌."
시원한 산 공기 속에 밝은 소년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떠올려 보면, 그 손을 잡았던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철이 들었을 즈음에는 부모도 없이, 혹독한 사막 마을에서 아무 도움도 없이 살았다. 그림자 속에서 숨을 죽이고 하루하루 목숨을 연장하는 것만 생각했다. 누구의 시야에도 머물지 않고 그저 죽은 듯이 호흡했다.
그런 어린 쿠크리에게, 그녀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신과 눈이 마주친 존재였으며 '운명' 그 자체였다.
"앞으로는 내 밑에서 배우도록 해. 자, 이리 오렴."
내민 손을 잡은 그때부터 쿠크리는 그녀의 '제자'가 되었다.
쿠크리의 스승은 아프리카 사막 오지에 사는 은자였다. 사람들이 망각한 전승을 전하는 유일한 이야기꾼이었으며, 때로는 대지의 정령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사람들에게 조언하는 샤먼의 역할을 맡았다. 그녀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생명의 위험이나 내일 먹을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더없이 평온하였다.
다만, 졸음이 쏟아지는 수업은 질색이었다. 분기점에서 무수히 갈라지는 '가능성의 우주', 갈라진 우주를 돌며 균형을 유지하는 '영혼의 도가니', 파괴와 창조를 담당하는 '어머니 신'―― 쿠크리가 보기에 전승의 내용은 하나같이 수상쩍었고, 그걸 열변하는 스승의 모습이 참 난감하였다. 명상 시간에도, 스승이 말하는 '대지의 목소리'는 들은 적이 없었다.
결국 못 참고 "이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라고 불평하면, 그녀는 늘 온화하게 웃으며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너도 언젠가 운명을 끈을 풀 수 있을 거란다."
그런 생활이 끝을 맞이한 건 쿠크리가 제자로 들어간 지 7년이 지나, 키가 훌쩍 자랐을 즈음이었다.
안에서부터 뭔가가 무너지는 듯한 충동이 덮쳐온 직후, 쿠크리에게 모래의 힘이 발현되었다. 발현하기만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모래바람을 일으키고 무차별하게 주변의 물기를 빼앗아버리는 힘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 폭주했다. 불운하게도 시내에 외출했던 스승이 돌아왔을 때 힘의 폭주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고, 쿠크리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다.
스승은 결의에 찬 눈으로 모래 폭풍 속으로 뛰어들었고,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 제자를 구했다.
그때의 기억은 불분명하기에 지금 쿠크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얄미울 정도로 자기만족으로 가득한 그녀의 평온한 미소, 그리고 밤을 새워 판 무덤뿐이었다.
마땅한 순서대로 스승의 유해를 매장한 밤, 문득 쿠크리의 뇌리에 언젠가 수업에서 들었던 말이 선명히 되살아났다.
"'영혼의 도가니'는 모든 우주와 연결되어 있어서 다원 우주로부터 온갖 가능성을 수렴하고 있다고 해. 하지만 그것들은 환영으로만 감지할 수 있어서 한정된 재능의 소유자만이 간섭할 수 있지. 나는 이 재능을 가진 자를 '앰프 스펙터'라고 부른단다. 원래 '영혼의 도가니'나 환영은 이쪽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시공의 뒤틀림, 앰프 스펙터와의 공명...... 이런 것들을 마중물로 삼아 이쪽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지."
쿠크리는 쏜살같이 집의 서고로 뛰어든 후, 기억을 더듬어 필사적으로 문헌을 뒤졌다.
책상 위에 두루마리가 겹겹이 쌓인다. 쿠크리는 쌓아 올린 석판의 무게에 책상다리가 삐걱대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문헌을 꺼내 책상 위에 내던지듯 올려놓았다.
"명심하렴. 만약 '영혼의 도가니'가 이 세상에 나타난다면 악한 자가 다가가게 해서는 안 돼. 그 힘은 너무나 위험해...... 이론상으론 죽은 자를 되살릴 수도 있으니 말이야."
거칠게 펼친 책의 한 구절을 보고는, 그의 손이 문득 멈췄다.
쿠크리는 거기에 적힌 어느 한 문장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스승의 말을 천천히 되새겼다.
"이론상으론...... 죽은 자를 되살릴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태껏 티끌만큼도 믿지 않았던 스승의 말이, 쿠크리에게 남은 단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그 후로는 1초도 허비하지 않고 목적만을 위해 그저 달렸다. 필요한 정보를 필사적으로 수집하여 겨우 도달한 종착점은 바로 안토노프가 주최하는 THE KING OF FIGHTERS였어야 했지만......
쿠크리가 발견한 것은 '영혼의 도가니'에서 부활한 애쉬 크림존뿐. 거기 있어야 할 스승의 모습은 없었다.
남프랑스의 어느 시가지, 큰길과 접한 오픈 테라스.
그곳엔 몸짓을 섞어가며 빠르게 떠들어대는 한 남자가 있었다.
"여태껏 했던 피나는 노력도 헛되이, 남은 건 싸구려만도 못한 문헌 더미와 애쉬 크림존뿐. 어렸던 나에게 길을 알려주고 자신의 목숨을 바쳐 지켜준 상냥한 스승은 어느 예측 낙하지점에도 없었고, 나는 고독하게 홀로 남게 됐지......"
후드를 깊게 뒤집어쓴 너무나도 수상한 그의 용모, 그리고 빈말이라도 품위가 있다곤 할 수 없는 말투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가게 분위기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평화로운 오후의 BGM처럼 귓가에 들리는 이야기를 도저히 견딜 수 없었을까? 근처 자리의 손님들은 한 명씩 가게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야기가 끝났을 즈음, 테라스에 남은 사람은 그의 맞은편에 앉은 소년과 그 옆에서 눈살을 찌푸린 채 인내하며 귀를 기울이는 상류층 여성, 둘 뿐이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후드를 쓴 남자―― 쿠크리는 호들갑스럽게 팔을 벌려 보였다.
"――여기까지가 이 몸이 즉흥적으로 생각한, 전 세계가 오열하고도 남을 슬프고도 애절한 이야기다. 어때? 5초 만에 생각해낸 것치고는 퀄리티도 상당하고, 짜임새가 탄탄하지? 손수건이 필요하면 빌려줘?"
"아하핫, 꽤 재밌었어~♪한가할 때 재미 삼아 듣기 딱 좋아."
"하아......"
먹다 만 자허토르테는 손을 대지 않고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조작하며 헤실헤실 웃는 애쉬 크림존과는 대조적으로, 엘리자베트 블랑토르쉬는 손가락으로 미간을 짚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난 대회가 시작하기 전, 상실감에 젖어있던 엘리자베트에게 접촉해서 애쉬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쿠크리였다. 그는 애쉬를 부활시키는 대신에 블랑토르쉬 가문에 도움을 청했고, 엘리자베트는 주저 없이 그 거래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애쉬는 이렇게 그녀의 옆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내고 있지만......
"뭐야? 그 한숨은. 네가 이야기해 달라고 떼를 쓰길래 내가 친절히 과거의 기억을 감동적으로 날조해 줬건만."
쿠크리가 붕대 감은 손가락으로 엘리자베스를 가리켰다. 테이블 위에 모래가 후드득 떨어졌고, 그것을 본 애쉬는 말없이 자허토르테 접시를 자기 곁으로 옮겼다.
"당신은 저와 애쉬의 은인. 그 큰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함께 갈 생각이에요."
엘리자베트는 인상을 쓴 채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는, 자신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시야에서 치우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저, 어째서 우리에게 그 손을 내밀었는지...... 당신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마음에 걸렸을 뿐이에요. 이유가 뭐든 저와 애쉬는 당신의 사정을 못 들은 척 넘어갈 생각은 없어요. 꼭 그렇게까지 농을 쳐야 하나요?"
애쉬는 실망한 듯한 표정으로 손에 든 컵을 내려다보는 엘리자베트와 당당하게 자세를 유지하는 쿠크리를 번갈아 본 후,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뭐 어때? 베티. 우리는 쿠크링에게 힘을 빌려주고 쿠크링은 KOF에서 목적을 달성한다...... 그거면 되잖아?"
"어이, 꼬맹이. 그딴 센스 빵점 호칭으로 날 부르지 마. 어떤 쬐그만 놈이 생각나서 불쾌하다고."
"앗, 이거 봐. 마침 특집을 하고 있어."
애쉬는 쿠크리의 불만을 무시하고 테이블 위에 스마트폰을 올렸다.
보도 프로그램이 보여주는 영상 속에서 'THE KING OF FIGHTERS'라는 글자를 본 쿠크리는 입을 닫았고, 엘리자베트도 마음을 다잡듯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어서 'KOF'에 참가하는 선수의 독점 인터뷰입니다! 이 영상을 보시죠."
영상은 스튜디오에서 길거리로 바뀌었고, 인터뷰어와 대면 중인 한 여성의 모습이 화면에 비쳤다.
"돌로레스 선수는 KOF 첫 참가입니다만, 어떤 마음가짐으로――"
금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카메라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쿠크리의 입가에 살짝 긴장이 맴돌았다.
쿠크리가 조용히 일어났다는 사실을 두 사람이 눈치챈 것은 그가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이 몸은 급한 용무가 떠올라서, 먼저 실례하겠어."
쿠크리는 두 사람에게 이 말을 남기고서는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빠른 걸음으로 가게를 나갔다. 자기중심적인 그의 행동에 화가 난 표정의 엘리자베트도 이어서 일어났다.
"기다려요! 아직 이야기가 안 끝났어요, 쿠크리!"
애쉬는 석조 바닥에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울리며 따라가는 엘리자베트의 모습을 곁눈질로 쫓으며, 자신의 손안에 남아 있는 케이크를 슬쩍 내려다봤다.
"아까 그 얘기가 '날조'......라."
은 포크를 케이크의 표면에 꽂으며, 애쉬 크림존은 조용히 웃음 지었다.
"그런 거로 해 두지 뭐♪"
그는 누가 말했는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린 후, 마지막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거짓말쟁이! 쿨라는 절대 용서 안 해! K'도 아저씨도 정말 미워!
울면서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간 쿨라를 보며 "내일이 되면 기분이 좋아질 거야"라며 무책임한 말을 한 건 누구였을까. 아무튼 K'와 맥시마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 아무리 NESTS의 잔당을 사냥하느라 피곤했다지만, 성가셔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녀에게 사과했어야 했다.
그러나 아침이 밝았을 때, 쿨라는 이미 평소 아끼는 배낭과 함께 모습을 감춘 후였다.
인적이 드문 뒷골목, 마치 숨듯이 자리 잡은 건물의 어느 방. 각지를 전전하는 K' 일행의 아지트 중 하나인 그곳에 그들이 있다. 집기들이 잡다하게 쌓여 거실이라고 하기도 힘든 그 방의 중앙에서, 윕이 굳은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사진을 늘어놓았다.
"가출한 쿨라의 행적을 알아냈어...... 상황은 전혀 좋지 않지만."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 소파에 나란히 앉은 K'와 맥시마는 그녀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 찍힌 것은 쿨라의 팔을 잡은 파란 머리의 청년과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은발의 여자였다. 청년의 얼굴 위쪽은 고글로 가려져 있었지만, 우호적이라고는 볼 수 없는 태도로 쿨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맥시마는 난처하다는 듯이 짧은 한숨을 쉬었고, K'는 초조한 듯 혀를 찼다.
"NESTS의 파멸 이후로 눈에 띄는 움직임 없이 잠복 중인가 했더니...... 지금 이렇게 앙헬과 짜고 쿨라를 유괴해서 KOF에 참가하다니. 잔당과 연결됐을 가능성은 작지만, 간과할 수 없는 사태인 건 분명해."
윕이 눈초리를 치켜뜨며 두 사람을 쏘아붙였다.
"당신들은 이번엔 이 남자―― '크로닌 맥도걸'과 접촉해 체포하고, 쿨라 탈환 임무에 착수해줘야겠어. 요컨대, 나와 함께 KOF에 출전해야 한다는 얘기야."
"......알겠다. 이번 일에 관해서는 이의 없어......"
그녀가 사진 위에 포개듯이 올려놓은 것은 'THE KING OF FIGHTERS' 초대장이었다. 윕의 눈빛은 역력히 "거절할 이유가 없을 텐데?"라고 말하고 있었다. 맥시마는 그런 그녀에게 항복하듯 어깨를 늘어뜨렸지만, K'는 흥미가 없다는 듯 외면했다.
"그 녀석이 멋대로 뛰쳐나간 거잖아. 왜 굳이 찾으러 가야 하지?"
그의 발언에 맥시마는 쓴웃음을 지었고, 윕은 질렸다는 듯 한숨을 뱉는다.
"이봐, 파트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아가씨가 가출한 건 우리 잘못이니까 말야."
"당신, 정말이지......"
"그 녀석이 쿨라를 납치한 것도, 굳이 KOF에 나가려 하는 것도...... 전부 단순한 도발로밖에 안 보여. 시시한 싸움을 굳이 받아주는 취미 따윈 없어."
말을 끝낸 K'는 팔짱을 끼고 입을 꾹 다물었다. 단순한 초조함이 아닌, 다소 경계심이 뒤섞인 목소리에 맥시마와 윕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고, 솔직히 나도 너랑 같은 의견이다. 단, 만약 녀석들의 목적이 우리를 유인하는 거라 가정했을 때 표적이 마지막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발끈해서 난동을 부릴 것 같아서 말이야."
맥시마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말에 K'와 윕도 짚이는 바가 있었다. 무너지는 건물, 하늘에 울려 퍼지는 두 사람의 환성―― 꽤 오래전 일이었음에도 그들의 마음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기억의 파편이 되살아났다.
윕은 괴로운 듯 손가락으로 미간을 짚으며 억누르듯이 말했다.
"맞아. 게다가 이번에는 지난번과는 상황이 달라. 일반 관객이나 곁에 있는 쿨라를 위험에 빠트릴 가능성이 있으니, 그들의 심기를 건드려선 안 돼."
"......"
쿨라의 이름을 듣고 K'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 것을 두 사람은 놓치지 않았다. 맥시마는 입을 닫은 채 팔짱을 끼고 있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고, 윕은 타이르듯 말을 걸었다.
"너도 알잖아? 파트너."
"함정이란 걸 알지만 가는 수밖에 없어."
"쳇......"
혀를 차는 소리가 포기를 뜻한다는 걸 두 사람은 쉽게 알아차렸다.
윕은 어깨 힘을 빼고 만족스럽게 테이블 위의 초대장을 집어 들었다.
"참가 접수는 내가 해 둘게. 쿨라의 행방에 대해서도 뭔가 더 알게 되면 연락할게."
그녀는 소파에서 일어나 방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리고...... 이 방, 짐을 좀 더 정리하는 편이 좋겠어. 쿨라가 다치면 큰일이잖아. 그럼 이만."
현관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배웅하는 맥시마 옆에서, K'는 험한 말을 내뱉었다. 맥시마는 그런 파트너를 곁눈질한 후 천천히 일어섰다.
"자, 그럼 공주님을 맞이하러 가기 전에 아이스크림을 잔뜩 준비해 둬야겠군."
"......그냥 네가 먹고 싶은 건 아니고?"
K'는 부엌으로 가 냉동고 안을 확인하는 맥시마에게 기가 차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며, 자신도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는 문득 테이블에 남겨진 크로닌 맥도걸의 사진을 발견하고는 한 손으로 집어 들었다.
"성가신 일에 끌어들이는군."
강철 글러브를 자신의 벨트 버클에 고정하고, 손가락 끝에 일으킨 불꽃을 사진에 갖다 댔다. K'는 흡사 육식동물 같은 눈빛으로 모조리 불탈 때까지 사진을 노려보았다.
병사가 손에 든 기기에선, 현지인도 접근하기 어려울 듯한 폐허를 공중에서 촬영한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촬영 중인 것은 잡초와 나무뿌리로 부자연스럽게 솟아오른 아스팔트 도로, 그 끝에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채 방치된 폐가였다. 은발의 젊은 여자가 쇼핑봉투를 끌어안고 상태가 좋지 않은 문을 노크하자, 안에서 고글 쓴 청년이 홀연히 나타났다.
기기를 뚫어지라 보던 병사는 놀라 숨을 삼키더니, 목소리를 낮춰 옆 병사에게 말했다.
"이 남자가 바로?"
"그래. 쿨라 다이아몬드의 유괴범이다."
그때 영상 속 청년이 문득 고개를 들어 고글 너머로 '이쪽'을 보았다.
청년은 오른손을 들어 영상 너머의 병사들에게 손바닥을 향했고――
"이봐, 설마 눈치챈 건......"
한쪽 병사가 그렇게 말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격렬한 불꽃이 스크린을 뒤덮은 찰나, 영상은 지글거리는 노이즈로 바뀌었다.정찰용 드론이 부서졌다는 결론에 이른 건, 그들이 노이즈를 쳐다본 지 5초가 지난 후였다.
청년은 폐가의 문을 난폭하게 닫고 근처에 있던 소파를 세게 걷어찼다. 은발의 여자, 앙헬은 그의 짜증에 동요하지 않고 쇼핑봉투와 타버린 드론 부품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벌레 같이 우글우글 나타나선! 성가신 녀석들."
"미안 미안. 미행당하는 줄은 몰랐어. 이거, 일단 주워놨어."
"그딴 쓰레기를 주워서 뭘 어쩌자고...... 참 나."
조금의 반성 기미도 없이 대답하는 앙헬을 노려보며, 청년은 탁자 위의 드론 부품을 집어 들었다. 앙헬은 휴대식량의 포장에 묻은 그을음을 손으로 가볍게 털어내더니, 쏘아붙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으~음" 하고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꼬리를 밟힌 걸지도 몰라. 슬슬 여기도 뜰까냥?"
"쳇...... 뭘 물어? 그러는 수밖에 없잖아......"
청년은 짜증스럽게 드론 부품을 등 뒤로 집어 던졌다.
곡선을 그리며 툭 떨어지는 프로펠러의 건조한 소리와 고물 냉장고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울렸다.
"앗! 쿨라의 아이스크림이 벌써 없잖아!"
청년은 얼음 한 조각 남지 않은 텅 빈 냉동고를 바라보는 쿨라 다이아몬드의 등 뒤로 성큼성큼 다가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이, 망할 꼬맹이. 여긴 이제 버린다. 얌전히 따라와."
퉁명스럽고 위압적인 청년의 말투에 쿨라는 잠깐 어깨를 움찔하는가 싶더니, 금세 휙 돌아보며 뺨을 크게 부풀렸다.
"또 이사야? 맨날 이래. 쿨라는 이제 이사 싫어!"
"그게 인질의 태도냐?"
"쿨라는 인질이 아닌걸. 쿨라는 그냥 가출한 건데, 너희가 멋대로 따라왔잖아."
"정말, 입만 열면 버릇없는 말이라 참 성가시다냥."
앙헬은 혀를 날름 내미는 쿨라에게 등을 돌리고 심술궂게 미소 지었다.
"그냥 자루에 넣어버려?"
"여기서 꼼짝도 안 할 생각이라면."
그때, 잡음 섞인 라디오에서 명랑한 시그널 음악이 느닷없이 울려 퍼졌다.
"속보입니다. 얼마 전 개최가 발표된 'THE KING OF FIGHTERS'와 관련해......"
쿨라의 시선이 고물 라디오에 꽂혔다. 거기에 반응하듯 청년도 그쪽으로 눈을 돌렸다.
조금 전의 반항적인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흐릿한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쿨라의 옆모습은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그 모습을 재빠르게 감지한 앙헬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그녀는 스마트폰에 사진을 한 장 띄워 쿨라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그나저나, 네 보호자 녀석들은 가출한 딸을 애지중지 찾으러 와줄까냥?"
"......!"
눈앞의 사진을 보고 쿨라의 표정이 굳었다. 감시 카메라의 데이터를 불법으로 빼낸 듯한 그 사진에는 구부정한 자세로 걷는 한 청년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선글라스 때문에 눈가의 표정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불쾌한 듯이 일그러져 보였다.
청년은 주먹을 꼭 쥔 쿨라를 힐끗 쳐다보고는, 비웃음 섞어 어깨를 으쓱였다.
"온다면 계획대로 해치워주지. 꼬리를 내리고 도망치면 크게 비웃어 주면 그만이야.
이봐, 망할 꼬맹이. 제대로 싸워. 너 같은 얼뜨기도 최소한의 전력은 되니까."
그 말에 쿨라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별 대꾸는 없이, 자신의 짐이 들어 있을 법한 작은 배낭 쪽으로 걸어갔다. '이사'를 받아들인 듯한 쿨라의 모습을 슬쩍 확인한 청년과 앙헬도, 얼마 안 되는 짐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용병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어서 뜨자고."
"그러자. 다음엔 조금 더 살기 편한 데로 가고 싶다냥...... 응?"
앙헬은 스마트폰을 다시 품에 넣고, 문득 뭔가 떠오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잠시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고 생각에 잠기더니, 완전히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청년에게 물었다.
"......그런데 지금 네 이름이 뭐더라?"
"또 잊은 거냐. 잘 들어. 한 번만 말할 테니 이번에는 꼭 외워둬."
청년은 고글 아래로 눈을 가늘게 떴다. 불규칙하게 깜박이는 구닥다리 전구의 빛이 반사하자, 그의 오른손을 감싼 흠집투성이 글러브가 둔탁하게 반짝였다.
"내 이름은 크로닌이다."
모스크바 뒷골목에 마음마저 얼어붙을 듯한 바람이 휘몰아친다. 인적도 없고 밤하늘의 별빛밖에 들어오지 않는 그런 곳에, 서로 몸을 기대고 걷는 두 명의 남자가 있다.
한 명은 중년 남성치고는 다소 작은 키. 다른 한 명은 곰으로 착각할 정도로 기골 장대한 거한이었다. 그들은 몸에 걸친 옷가지 말고는 별다른 짐이 없어 보였다. 그들의 눈앞에 신문지 몇 장이 바람에 실려 날아와 붉은 벽돌벽에 붙자, 그들은 무심코 그 종이를 보았다.
――KOF 스타디움 붕괴는 '계획된 사건'인가? 과격한 연출이라는 비판 쇄도!
――내부 고발! 모든 건 안토노프 사장의 독단적 연출이었다!? 과거 업적에도 수많은 의문.......
――안토노프, 사임 표명! 안토노프 코퍼레이션 이사회, 후임은.......
지면을 보고 두 남자는 부들부들 떨었다.
덩치 큰 남자가 주먹으로 벽돌벽을 세게 치자, 신문지가 그 충격으로 찢기며 골목 안쪽으로 날아갔다.
"사, 사장님......"
"누가 사장이냐!"
그의 외침에 몸집 작은 남자는 뻗으려던 손을 앗 하고 움츠렸다.
"조작이라니, 말도 안 돼......! 그런 시시한 짓을 이 몸이 할 리가 없잖아......!"
털썩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은 거한이 바로 지금 전 세계에서, 의도치 않게, 화제를 모으고 있는 안토노프 코퍼레이션의 전 오너, 안토노프 본인이었다.
그가 주최한 『THE KING OF FIGHTERS』에 갑자기 나타난 괴물은 그가 몇억이나 투자해 세운 스타디움을 산산조각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래도 챔피언과 괴물의 사투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기에 이런저런 손실을 제외해도 대회는 크게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SNS에 안토노프의 조작 의혹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허무맹랑한 소문은 삽시간에 전 세계에 퍼졌고, 안토노프가 인지했을 때쯤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의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 결과, 그는 부하인 야곱과 함께 야반도주 같은 모양새로 모스크바의 뒷골목을 방랑하게 되었다.
잠시 웅크리고 있던 안토노프가 느닷없이 고개를 옆으로 세게 흔든다.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 몸뚱이 하나로 다시 일어서고 말겠어!"
몸집 작은 남자, 야곱은 무너진 안토노프를 잠시 바라보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연다.
"하나가 아니라 둘입니다, 사장님. 아니...... 안톤! 저는 어디든 함께하겠습니다. 옛날부터 그랬잖습니까."
"오오...... 야곱......!"
두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뇌리에 지금까지 추억이 흘러넘치고, 학창 시절 기억까지 떠오르려는 그때였다.
대로에 접한 좁은 골목에서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챔피언 아저씨!?"
"그, 그 목소리는!?"
거기 서 있는 것은 가족끼리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이었는지, 부모에게서 떨어져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 한 남자아이였다. 다름 아닌 KOF에서 안토노프가 몸을 던져 지켜줬던 소년, 미샤였다.
미샤 부모님의 소개로 안토노프와 야곱은 간신히 아파트 한 칸을 얻었다. 유선전화 한 대 놓여 있을 뿐인 검소한 방이었으나, 극한의 땅 시베리아에서 실력 하나로 성공한 경험 있는 안토노프와 곁에서 그를 쭉 지켜봐 온 야곱에게는 그거면 충분했다.
전화 한 대를 밑천 삼아 그들은 새 사업을 시작했다. 그렇다, 그것은 바로――
"......정말 우여곡절 끝에 이 단체를 창설했지. 이런, 서론이 길었나."
검지로 하얀 웨스턴 해트의 끈을 살짝 끌어 올리며, 안토노프는 선글라스에 가려진 눈을 가늘게 떴다. 그와 동시에 시가를 문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어서 와라, 갤럭시 안톤 레슬링에! 환영한다, 라몬, 킹 오브 다이너소어스!
크게 팔을 벌린 안토노프의 뒤에는 플래카드가 한 장 걸려 있다. 거기 그려진 로고 마크―― 갤럭시 안톤 레슬링의 약칭인 G.A.W는 지금 '초신성 프로 레슬링 단체'로 전 세계에 알려져 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G.A.W. 사장실이다. 그러나 아파트 한 칸을 사무소로 쓰기 때문에 딱히 사장실이라 구분할 것도 없었다. 언뜻 돌아보면 중고 사무용 책상들이 늘어서 있을 뿐인 평범한 실내였다.
그러나 라몬과 다이너소어스에겐 바로 그런 공간이기 때문에 사무실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미소 지으며 안토노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 앞으로 잘 부탁해, 사장."
"YOU와 함께 일할 수 있다니 영광이다!"
야곱은 안토노프와 악수하는 라몬과 다이너소어스의 모습을 기쁘게 지켜보다,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물었다.
"이적해주신 건 우리에게도 아주 감사한 일입니다만...... 두 분 모두 멕시코에서 쌓은 경력이 있잖아요. 괜찮으시겠어요?"
그의 질문에 라몬은 명랑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다이너소어스는 그 옆에서 듬직하게 팔짱을 끼고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멕시코를 떠났다고 해서 고향을 향한 애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요즘 같은 시대, 프로 레슬링에 국경이 어딨겠어. 멀리 떨어져 있어도 팬들에게 우리의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니 상관없어!"
"더구나――" 다이너소어스 옆에 있던 라몬도 입을 뗐다.
"당신들이 목표로 하는 건 '러시아'가 아니라 '세계 챔피언'이잖아?"
야곱은 그 말에 감동했는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안토노프의 입가에 점점 미소가 깊어지는 듯하더니, 유리창이 흔들릴 정도의 성량으로 크게 웃었다.
"와하하하하핫! 너희, 점점 더 마음에 드는군!"
안토노프는 라몬과 다이너소어스를 번갈아 보더니 기세 좋게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지만 틀렸어! G.A.W.의 목표는 세계가 아니야...... '은하계 챔피언'이다!"
선글라스 안쪽에서 반짝이는 안토노프의 소년처럼 밝은 눈. 그 시선에 사로잡힌 라몬과 다이너소어스는 얼굴을 마주 보며 즐거운 듯이 웃었다.
"일단 목표를 향한 첫걸음으로 KOF에 출전하겠다! 그리고 챔피언 자리를 되찾는 거다...... 우리 셋이서!"
"좋~아! 그러면 전 세계도 후끈 달아오르겠지."
"음! YOU, 그리고 이 단체의 미래를 위해 나도 전력을 다하겠다!"
"......그런데 공룡, 아까부터 악역답지 않은 말만 하는 거 같은데?"
"뭐!? 지, 지금은 비시즌인 데다가 사장 앞이다. 문제 될 거 없잖아!"
시베리아의 빙설마저 금세 녹여 버릴 듯한 열정이 그들 안에 깃들어 있다. 이것이 G.A.W.의 진정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야곱은 뜨거운 대화를 나누는 안토노프, 라몬, 다이너소어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밝은 웃음으로 가득한 미래를 상상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사우스타운 거리에 자리한 가게 '바 일루전'. 해가 저물기 시작한 무렵, OPEN 팻말이 걸린 문이 기세 좋게 열리며 아름다운 여자 한 명이 가게에 들어섰다.
"킹 씨, 내 얘기 좀 들어봐!"
익숙한 표정으로 익숙한 대사를 뱉으며 바 카운터로 곧장 걸어오는 여자를 보고, 가게 주인인 킹은 무심코 쓴웃음을 지었다.
"어서 와, 마이. 또 앤디와 팀을 짜지 못했다는 이야기야?"
"맞아! 진짜, 그렇게나 말했는데 왜 나랑 함께 팀을 안 짜는 건데!?"
킹이 내민 유리잔의 음료를 쭉 들이켜더니, 킹의 친구인 그녀―― 시라누이 마이는 카운터에 풀썩 엎드렸다. 그녀의 연인이 형과 친구를 우선시하는 건 매번 있었던 일이라, 이렇게 그녀가 화가 나서 가게에 들이닥치는 것도 일상이 되다시피 했다.
마이가 얼굴을 드는 걸 보고 킹이 그녀의 푸념에 귀를 기울이려던 그때, 아까와 같은 기세로 문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뒤돌아보자 거기엔 기분 나쁘다는 듯 눈꼬리를 치켜세운 유리 사카자키가 있었다.
"어서 와, 유리."
"앗, 유리. 여기 자리 비었어."
유리는 마이가 가리킨 옆 빈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의자에 앉으며 두 사람에게 몸을 내밀었다.
"킹 씨, 마이 씨, 내 얘기 좀 들어봐!"
그녀의 화난 얼굴에서 몇 초 전의 마이를 떠올리며 킹은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오빠가 나한테 느슨해졌다느니 실력이 둔해졌다느니 하면서 팀에 안 넣어줬다니까!? 최근에 불고깃집 아르바이트로 바빴던 건 사실이지만, 틈날 때마다 자발적으로 훈련했다고! 돌아오자마자 이러다니 너무하지 않아!?"
카운터에 두 손을 짚으며 눈썹을 추켜세우는 유리를 바라보며, 마이는 동정한다는 듯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해도 너무하네. 앤디도 그렇고 유리의 오빠도 그렇고, 우리 노력을 너무 가볍게 보는 거 같아. 여자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껏 노력하는데 말이야."
유리잔을 한 손으로 꽉 움켜쥐며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마이의 모습을, 유리는 감명받은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 호흡이 지난 뒤 마이는 유리잔을 카운터에 쾅 내려놓고, 열의에 가득 찬 눈빛으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 그렇다면 네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어! KOF라는 멋진 무대에서 오빠에게 본때를 보여주는 거야!"
"응! 반드시 오빠가 찍소리도 못하게 해줄래! 마이 씨도 앤디 씨에게 똑똑히 실력을 보여줘!"
마이와 유리는 손을 굳게 마주 잡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그러니까 킹 씨――"라며 뒤돌아보자, 매우 곤란한 표정의 킹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조금 미안한 듯 시선을 내리깔며 마이와 유리에게 말했다.
"아, 그거 말인데. 이번엔 함께 못 갈 것 같아."
"뭐? 일단 보류하겠다고 말하더니, 무슨 일 있어?"
"......실은 얼마 전에 료가 팀에 들어오라고 했거든. 너희라면 멤버 모으는 건 문제없을 테고, 진지한 표정으로 부탁해서 수락해 버렸지 뭐야."
킹은 "그러니까 미안"이라고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지만, 마이와 유리는 잠시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며――
"뭐어!?"
유리잔마저 흔들릴 듯한 그녀의 놀란 목소리에, 킹도 움찔하며 어깨를 떤다.
마이는 한바탕 놀란 후, 얼이 빠진 건지 기쁜 건지 모를 표정으로 카운터 너머의 킹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뭐야, 미리 말했으면 축하 선물을 가져왔을 텐데. 축하해, 킹 씨! 이번 기회에 제대로 데이트 약속도 잡아!"
"뭐야, 놀리지 마. 로버트도 있고 팀 일원으로 참가하는 것뿐인걸......"
자기도 모르게 뺨을 붉히는 킹을 바라보며, 유리는 복잡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렸다.
"그런 게 어딨어! 오빠를 바보라고 욕해주고 싶지만, 킹 씨랑 오빠 사이가 진전되면 나쁘진 않을 거 같기도...... 소녀의 마음은 너무 복잡해......"
"여기선 꾹 참아야 해, 유리! 친구로서 킹 씨의 연애를 응원하자!"
"......그래야겠지, 킹 씨가 내 언니가 될지도 모르는 절호의 기회니까!"
"너희 정말......"
미간을 좁히며 우물쭈물하는 유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마이는 격앙된 목소리로 타일렀다.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자 유리의 얼굴도 한층 밝아졌다. 완전히 친구의 연애를 지켜보는 자세가 된 두 사람의 시선에, 질린 건지 체념한 건지 킹은 그저 한숨만 쉬었다.
한편 그 무렵, 가게에서 벌어진 소동을 전혀 모르는 한 명의 소녀가 사우스타운 거리에 서 있었다. 청초한 원피스에 바스켓 해트를 깊이 눌러 써서, 옆에서는 눈매가 잘 보이지 않는다. 날이 더 저물어 마을의 네온사인이 어슴푸레 밝아질 때쯤, 그녀는 바 일루전의 문 앞에서 긴장한 채 서류 한 장을 쥐고 있다.
심호흡한 후, 결심했다는 듯 손잡이를 잡고 소녀는 가게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섰다.
"저기, 실례합니다! 여기에 마이 씨와 유리 씨가 계신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그녀의 선명한 목소리가 가게에 울려 퍼졌다. 카운터에서 화기애애 재잘대던 세 여자가 문 쪽을 돌아본다. 그리고 소녀의 모습에 뜻밖이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테나잖아. 마이와 유리라면 여기 있는데, 무슨 일이야?"
킹은 카운터 너머로 마이와 유리를 가리키며 소녀―― 아사미야 아테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본에서 아이돌로 활동하는 그녀가 어째서 사우스타운까지 왔을까? 자꾸만 의문이 들었다. 프로듀서와 스승인 친 겐사이는 물론이고 그녀의 동문 제자이자 그녀의 열성팬이기도 한 시이 켄수의 모습도 없는 거로 보아, 몰래 건너온 것으로 추측된다.
아테나는 모자를 벗고 자세를 바로 한 뒤 마이와 유리 쪽을 보았다.
"저기, 마이 씨와 유리 씨에게 꼭 부탁하고픈 이야기가 있어요......!"
열의로 가득한 그녀의 눈을 보고 마이는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숨을 삼켰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막듯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 아테나."
그 옆에서 유리도 다시 팔짱을 끼며 응응 고개를 끄덕인다.
"아테나의 마음은 그 누구보다 잘 알아......"
그녀들의 반응을 보고 아테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두 분도......! 그래요, 실은――"
그들이 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는지, 아테나가 표정을 누그러트리고 말을 이어가려 한 그때였다.
한 손으로 시원하게 카운터를 탕 치며 마이가 승부욕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이번 KOF는 나, 유리, 아테나 셋이서 함께 도전하자!"
"네? KOF......?"
놀란 아테나가 눈을 크게 뜨는 것도 깨닫지 못했는지, 유리도 의자에서 일어나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가련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아주 강력한 슈퍼 히로인 팀의 탄생! 전 세계에 우리 힘을 보여주자!"
"아니 그게 아니라...... 마이 씨? 유리 씨?"
"이 멤버라면 우승은 틀림없어!"
오해를 바로잡으려고 힘겹게 호소하는 아테나의 모습은 이미 눈에 안 들어오는지, 마이와 유리는 이미 열정과 의욕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손을 맞잡고 있다.
곤혹스러운 아테나에게 킹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어. 다른 볼일은 대회가 끝난 후에 해도 늦지 않겠지?"
"네, 네에......"
"그럼 대회가 끝나면 천천히 얘기하자."
대회를 향한 의지를 담아 이야기하는 마이와 유리의 모습에, 아테나의 어깨는 축 늘어졌다.
"으으, 열심히 할게요......!"
두 사람 옆의 빈자리에 앉는 아테나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며, 킹은 새 유리잔에 손을 뻗었다.
승부욕이 강한 마이, 지기 싫어하는 유리와 한 팀이 되어 싸우는 건 꽤 힘든 일이겠지만, 알고 지낸 지 오래된 아테나라면 충분히 힘을 써줄 것이다. 대회가 끝나면 위로해주자고 생각하며, 킹은 물을 따른 유리잔을 그녀 앞에 놓았다.
사우스타운 한구석에 사람들의 눈을 피하듯 자리한 바가 하나 있다. 인적도 드문 그 가게 안의 바 카운터에는 남녀 한 쌍이 앉아 있다. 둘 다 품위 있는 분위기에 키가 늘씬하고, 손끝의 움직임 하나조차도 우아하게 느껴지는 미남 미녀였다.
그들이 가게에 들어오고 한 시간은 지났을까. 이야기를 일단락 지은 남자가 안경테의 위치를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조정하는 것을 곁눈으로 바라본 뒤, 검은 머리의 미녀는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당신이 갖고 싶은 물건이지?"
카운터 위에 놓인 사진을 소리도 없이 품속에 넣으며 젊은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을 손에 넣는 건 아무리 당신이라도 어렵겠지요......"
"어머, 실례되는 말이네."
"만약 어떤 식으로든 당신 손에 들어온다면, 제게 넘겨주시겠습니까? 물론 보상은 확실히 하겠습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둘 사이에 놓인 유리잔에서 얼음이 카랑하고 소리를 냈다. 젊은 남자가 안경 너머로 바라보는 시선에 한 번 웃음을 흘리곤, 미녀는 조용히 일어섰다.
"그럴게. 만약 내 손에 들어온다면......"
그녀의 말을 듣고 남자는 입가에 옅은 웃음을 띠었다. 미녀는 자리를 뜨면서 바 한구석에 있는 장식이 과한 스툴을 한번 보았으나, 특별히 관심을 두진 않고 손잡이에 손을 뻗었다.
"또 봐, 하인."
그렇게 그녀―― 루온은 바를 뒤로했다. 남겨진 것은 바 출입문에 부착된 벨이 카랑카랑 울리는 공허한 소리뿐이었다.
햇빛이 눈부시게 내리비치는 오후, 바닷새의 울음이 평화로운 파도 소리를 타고 울려 퍼졌다.
그녀가 가게에 온 지 그럭저럭 한 시간이 지났다. 땀이 나는 햇볕 때문인지 아니면 SNS에서 화제라는 가게라서 그런지 젊은 커플들이 끊임없이 가게에 들어왔다. 특히 바다로 튀어나오도록 설계된 이 카페테라스에는 손님들이 많아서, 얼굴을 맞대고 빨대에 입을 대는 커플들의 대화 소리도 끊임없이 들려왔다.
손에 든 태블릿을 테이블 위에 놓고 블루 마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낭패인걸. 역시 더는 꼬리 잡히지 않겠다 이건가......"
그녀는 동업자인 바네사의 호출을 받고, 그녀가 약속 장소로 지정한 이 테라스 자리를 지키고 있다. 쉬는 날이기도 해서 처음엔 식사를 즐겼지만, 바네사로부터 '미안, 한 시간 정도 늦을 거 같아'라는 메시지를 받은 뒤로는 자신의 업무 내용을 꼼꼼하게 확인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리는 자신의 태블릿 화면에 표시된 파파라치 사진 한 장을 노려본다.
지난 KOF 이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하워드 커넥션의 신입, 하인. 그는 어떤 의도를 갖고 하워드 커넥션에 잠입해 있다. 하워드 커넥션에도 들키지 않게 움직이고 있지만, 도무지 꼬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최근 몇 개월 동안 마리가 알아낸 힌트라곤, 고작 이 파파라치 사진 한 장뿐이었다.
"하워드 커넥션의 눈을 교묘하게 피하면서까지 이뤄지는 밀회라. 보통 밀회 같지는 않은데......"
거기엔 사우스타운 외곽의 바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는 하인과 검은 머리의 미녀―― 김갑환의 스승인 강일의 연인이자 지난번 KOF에 얼굴을 내민 수수께끼의 여자―― 루온의 모습이 찍혀있었다.
"루온...... 그녀의 정체는 대체 뭐지?"
마리가 미간을 찌푸린 그때였다. 객석 사이를 누비듯 낯익은 진홍색의 머리가 시야에 비쳤다.
"마리, 기다렸지~! 늦어서 미안해."
"진짜, 네가 불러 놓고 지각하면 어떡해."
태블릿 단말기의 전원을 끄면서 마리는 쓴웃음으로 표정을 바꾸며 얼굴을 들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바네사의 뒤로 걸어오는 사람을 보고 순간 굳어졌다.
바네사의 뒤에 있는 사람은 늘씬하고 키가 큰 검은 머리의 미녀였다. 조금 전까지 마리가 수상쩍어하며 째려보던 사진 속 인물과 동일인이다. 루온은 그런 마리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온화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어 그러니까, 블루 마리 씨......였나요?"
"......응, 맞아. 이런 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루온. 솔직히 놀랐어."
마리가 웃는 얼굴로 인사하자, 루온도 눈가에 웃음을 띠었다.
두 사람이 인사하는 동안, 바네사는 빈 의자에 앉더니 테이블에 놓인 메뉴판에 손을 뻗으면서 마리에게 말을 걸었다.
"'협력자'를 마중하러 갔었어. 네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야."
마리는 태블릿 단말기를 가방에 넣으며 바네사에게 눈길을 돌렸다.
"어머, 너한테 일 얘기를 했었나? 바네사......"
"착각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는걸?"
"맞아. 난 KOF에서 느낀 재미와 스릴이 도무지 잊히질 않아. 하지만 그 사람이나 갑환은 지금 수행 중이라 힘들고, 속 모를 사람이랑 같은 팀이 되는 건 별로잖아?"
루온도 자리에 앉으며 바네사가 건넨 메뉴판을 받아 쥐었다. 눈치채지 않도록 관찰했으나 마리는 그녀의 조금 곤란한 듯한 말투와 표정에선 진의를 파악할 수 없었다. 추측해 봐야 소용이 없나 하고 머릿속에 포기라는 단어가 스친 순간, 마리는 루온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래서 너희를 떠올렸어. 같은 여자인데다 성격도 좋아 보이고,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거 같거든. 특히 마리, 너와는 '대화 주제'도 맞을 거 같고...... 친구에게 여러 가르침을 받았다는 소문도 있잖아. 너라면 분명 흥미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이렇게 말한 뒤 그녀가 지은 미소에선 '숨은 의미'가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일부러 과장하는 듯한 그녀의 미소에 마리의 눈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그러게. 무슨 일을 꾸미는지 말해준다면 더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거 같지만 말이야."
마리와 루온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의기투합한 여자들처럼 보였겠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악의와 불신과 적개심이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불꽃이 파지직 튀고 있었다.
마치 그 불꽃을 싹 꺼버리듯, 바네사가 두 사람의 얼굴 사이에 접힌 메뉴판을 흔들었다.
"뭐, 상관없잖아. 그녀는 실력도 더할 나위 없고 말이야. 만약 꿍꿍이가 있대도, 나는 용병 부대 대장에게 방해받지 않고 타깃을 감시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해. 너도 하워드 커넥션의 정보를 몰래 빼내 준다면 그걸로 만사 오케이잖아?"
그녀는 근처에 있는 점원을 불러 세워 익숙하게 메뉴를 주문하더니, 표정을 누그러트린 마리와 루온을 번갈아 보았다. 바네사의 미소는 평소처럼 싹싹했으나, 두 사람을 향한 그 눈에는 일할 때만 볼 수 있는 진지함이 서려 있었다.
"먼저 나랑 마리는 루온을 KOF로 데려갈 거야. 대회가 시작되면 너희는 내 일을 도와줘. 그리고 대회가 끝나면 루온과 내가 보상으로 마리에게 필요한 정보를 줄게. 필요한 조건은 각각의 일을 완벽하게 끝내는 것...... 두 사람 모두, 이의 없지?"
그녀의 말에 루온은 싱긋 미소 지었고, 마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두 사람의 반응을 본 바네사는 웃는 눈으로 만족스럽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좋아! 그럼 마음 맞는 여자들끼리 서로 도우며 잘해 보자~♪"
타이밍 좋게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왔다. 테이블에 차례차례 음료와 요리가 놓이는 와중에 마지막으로 쿵 소리를 내며 놓인 커다란 맥주잔을 보자, 마리는 자기도 모르게 윽하고 표정을 굳혔고, 루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굉장한 양이야. 거품이 넘쳐흐르네......"
"잠깐, 아무리 쉬는 날이지만 설마 대낮부터......"
"그런 실례되는 말을~ 당연히 무알코올이거든~? 자, 너희도 잔 들어!"
두 사람이 각각 유리잔을 손에 쥔 것을 확인하자, 바네사가 웃으며 '팀 결성 기념 건배'라고 말하며 맥주잔을 치켜들었다. 생맥주의 연못에서 넘쳐흐르는 하얀 거품에 밝은 햇살이 반짝반짝 빛났다.
수평선 위에 떠 있는 적란운을 쫓기라도 하듯이 함정이 줄지어 있다. 어느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고 전 세계를 항행하는 그 함대는 하이데른이 이끄는 용병 부대의 본거지였다.
그들은 함대 중앙에 있는 항공모함 선내의 브리핑실에 있었다.
"이 작전에서 우리의 목표는 '버스'...... 지난 대회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괴물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이다."
어두운 실내에서 데이터가 투영된 스크린 앞에 선 하이데른이 빙글 돌며 일동을 둘러보았다.
상관을 마주 보듯 정렬한 이들은 랄프, 클락, 레오나 세 사람. 그들은 하이데른에게 시선을 맞추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작전 내용에 집중했지만, 두 사람의 낯선 손님에게 약간의 의식을 할애하고 있었다.
"각지의 중력파 관측 결과와 더불어 협력자...... 돌로레스 씨가 제공한 유력한 정보에 따르면 녀석이 다시 KOF에 출현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이데른은 협력자라는 단어를 말하며 일순간 옆에 있는 여성에게 시선을 옮겼다. 돌로레스라고 소개한 그 여성은 세 사람에게 우아하게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그녀가 세 사람을 보는 눈에서는 마치 관찰하는 듯한―― 나쁘게 말하자면 평가하는 듯한 태도가 느껴졌다.
"다음 출현에 따른 피해는 저번 대회를 크게 웃돌겠지. 피해를 최소화하고 조기에 녀석을 저지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다."
말을 마친 하이데른이 방의 조명을 켰다. 실내가 다시 밝아지자, 긴장감이 돌던 분위기도 자연스레 누그러지는 듯했다.
바른 자세는 그대로 유지한 채, 선글라스 뒤의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리며 클락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이번 작전의 중요성은 이해했습니다만, 설마 교관님께서 전선에 나서실 줄은 몰랐습니다."
"맞아. 심지어 교관님의 팀 동료가......"
랄프가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방의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벽에 등을 기대고 따분하다는 듯 손가락으로 장난을 치던 소녀가 고개를 휙 들었다. 그녀는 위협하듯 랄프를 노려보며 온몸에 힘을 줬다.
"어이쿠. 이거 실례했군, 리더 아가씨."
마치 길거리에서 마주친 길고양이 같은 반응에 쓴웃음을 지으며, 랄프는 시선을 상관에게로 되돌렸다.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하이데른이 한숨을 돌린 후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 작전에서 '앰프 스펙터'...... 이슬라 그리고 슌에이의 존재는 굉장히 중요하다. 지난 대회에서 슌에이에게 그 징후가 나타났던 것처럼, 버스 재출현 시에 그들의 힘이 폭주할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
랄프와 클락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방에 들어온 후로 표정 변화가 전혀 없던 레오나마저 상관의 말에 눈빛이 달라졌다.
"랄프, 클락, 그리고 레오나. 너희의 주요 역할은 대회 경과 관찰 및 슌에이 감시다. 만약 그의 능력이 폭주하게 되면 진압에 들어가라."
하이데른이 말을 끝내자 실내에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침묵 속, 레오나는 버스 내부에서 오로치가 나타났던 때를 떠올렸다. 쿠사나기 쿄, 야가미 이오리, 카구라 치즈루에게 퇴치되었다는 보고는 들었으나, 그걸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레오나는 직감하고 있었다.
그녀 안에 잠든 저주받은 피가 지금도 여전히 꿈틀대고 있다. 레오나는 몇 번이나 피에 저항하며 싸우고, 폭주하기도 했으며, 그럴 때마다 곁에 있는 상관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이제 와서 예전처럼 겁낼 생각, 질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 충동은 '지금까지와는 뭔가가 다르다'. 그런 예감이 레오나의 가슴 속에서 작은 불안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만약에 예감이 적중해서 그녀 자신이 폭주해버린다면, 임무 수행에 커다란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조금이라도 불안 요소가 존재한다면 보고해야 할까? 이런 생각에 레오나가 입을 열려던 그때였다.
"하하, 그렇군. 그런 거라면 우리가 적임자겠지."
대담한 미소를 띤 랄프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는 옆에 있는 레오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관님, 맡겨주십시오. 폭주하는 녀석을 제압하는 데에는 익숙하니까요."
"맞습니다. 늘 하던 대로 참가해서, 늘 하던 대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레오나의 맞은편에서 조용히 동조하는 클락의 입가에도, 평소와 다름없는 웃음이 떠올랐다.
레오나는 그들의 모습을 곁눈질한 후, 다시 하이데른 쪽을 바라봤다. 그녀의 입가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다. 그것이 웃음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것은 그녀가 신뢰하는 동료들과 그녀를 지금까지 지켜봐 온 하이데른뿐이었다.
"......알겠습니다, 교관님."
꾸밈없고 솔직한 대답에 하이데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 중, 결전 스타디움에서 북쪽 6km에 위치한 해상에 함대를 대기시킨다. 각자 방심하지 말고 임무에 착수하도록. 이상!"
"――네!"
허리 굽혀 인사하고 의연한 발걸음으로 브리핑실을 나서는 세 부하의 모습을, 하이데른은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이글이글 타는 듯한 햇볕 아래, 어느 아동 보호 시설의 문 안쪽에서 장신의 남녀―― 하이데른과 돌로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이 부지에서 길가로 나온 순간, 마치 어서 가라고 재촉이라도 하듯이 철문이 쾅 닫혔다.
하이데른은 문 안쪽에서 새어 나온 직원의 혀 차는 소리에도 미동하지 않고, 품에서 태블릿 단말기를 꺼냈다.
"역시 여기에도 없나."
"응. 그나저나...... 태도가 아주 거만했어. '그녀'가 왜 도망쳤는지도 이해가 돼."
돌로레스는 순금 안경테를 손가락으로 살짝 밀어 올리며 문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이데른은 그녀의 말에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조금 전 둘러보고 온 시설 내부 상황을 떠올렸다.
미리 약속했음에도 마치 두 사람을 골칫거리처럼 응대하던 소장. 멀리서 들려오는 직원인 듯한 어른들의 호통. 복도에서 스쳐 지나간 아이들의 그늘진 표정만 봐도 적어도 이곳이 아이들에게 안락한 시설이 아니라는 점은 불 보듯 뻔했다.
하이데른은 어느샌가 자신에게 집중된 돌로레스의 시선을 모르는 체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우선해야 할 일은 소녀의 수색이다. 시설의 문제 개선이 아니야."
그 대답을 들은 돌로레스가 미소를 띄웠다.
"후...... 그래. 하지만 시내는 넓어. 수색할 곳은 정해 놨어?"
"나를 우습게 보지 말아줘."
하이데른이 걷기 시작하자 돌로레스가 그 뒤를 쫓았다.
'남미에서 활동하는 실력파 신예 그라피티 아티스트'. 이것이 그들의 수색 대상이다. 수색 대상이 그린 작품은 현지 젊은이들 사이에서 열광적 인기를 자랑했고, 그 인기는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해외로 옮겨붙기 시작했다. 그녀는 신출귀몰해서 어른들의 의표를 찌르듯 길거리에 나타나 라이브 페인팅을 펼치고 경찰이 출동할 때쯤에는 자취를 감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상대를 넓은 시내에서 찾아내기란 더없이 힘들다. 그러나 '프로'가 맡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정도 족적이면 뒤쫓는 데엔 아무 지장이 없겠지."
하이데른은 거리에 모여드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멀리서 포착하며 태블릿을 다시 품에 넣었다.
가득 모인 인파는 이 지역의 십 대 젊은이들인 듯했다. 그러나 그중엔 아직 십 대가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모두 열광하여 환성을 지르고 휘파람을 불며 눈앞에서 선명히 휘몰아치는 색채를 즐기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한 소녀가 선명한 노란색 상의를 펄럭이며 벽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씩씩하게 방독 마스크를 착용하고 경쾌한 스텝으로 위치를 바꿔 가며 양손의 스프레이 캔을 벽면에 분사했다. 얼핏 보기에 그녀는 재기와 활력 넘치는 지극히 평범한 아티스트다. 그러나 진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녀 본인이 아닌―― 그녀의 바로 위를 날아다니는 '손'이다.
"아만다, 패스!"
소녀는 스프레이 캔을 무심하게 공중으로 집어 던졌다. 하늘로 날아오른 그 캔을 신비한 아우라를 뿜는 보라색 '손'이 재빠르게 잡아챘다. 그리고 '손'은 소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페인팅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확실히 슌에이라는 소년이 다루던 환영의 손과 닮았다. 그와 다른 점을 꼽자면 그녀가 사용하는 환영의 손은 작고 파괴력이 낮아 보인다는 점, 그리고 스스로 의지를 지닌 것처럼 움직인다는 점이리라.
하이데른과 돌로레스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챈 관중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짐과 거의 동시에 그녀들의 그림이 완성됐다.
"네가 이슬라?"
하이데른의 말에 뒤돌아본 소녀는 수상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를 덮은 마스크를 벗었다.
"뭐야...... 그렇다면 어쩔 건데? 그것보다 당신들은 누구야?"
이슬라가 두 사람을 안내한 곳은 인적이 드문 작은 공원이었다. 공원 구석에 있는 놀이 기구 옆에 멈춰 서자, 그녀는 불신을 드러내며 하이데른 일행을 빤히 노려봤다.
"THE KING OF FIGHTERS는 부자들이 개최하는 격투 대회 아냐? 전에 열린 대회도 봤어."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우뚝 선 이슬라의 곁에서, 환영의 손(이슬라는 '아만다'라고 부르는 듯하다)이 섀도복싱을 하듯 주먹 쥐는 자세를 취했다. 호전적인 자세이긴 했지만, 경계심은 있을지언정 해칠 마음은 없음이 느껴졌다.
돌로레스와 눈짓을 주고받은 직후, 하이데른은 이슬라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우리 팀 동료로 대회에 참가해 줬으면 한다."
"내가 왜?"
"미안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 대답을 해줄 순 없다. 네가 우리 요청에 응한다면 정보를 알려주마. 그런데...... 대회 참가 자체는 너에게도 이익이 될 거라 생각한다만."
하이데른은 점점 더 표정이 험악해지는 이슬라를 지켜봤다. 몇 걸음 떨어진 위치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돌로레스도 점수를 매기는 듯한 눈빛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이슬라는 "치사하게 약점이나 잡고"라며 불쾌하다는 듯 혀를 찼다.
"......확실히 우승 상금이 있으면 시설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을 먹일 수도 있고, 참가만 해도 나와 아만다의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지겠지. 지금의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이슬라는 캡의 차양을 손가락으로 쓱 내리며,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당신들 너무 수상해. 전혀 믿음이 안 간다고."
그녀는 더 할 말도 없다는 듯 하이데른 일행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 옆에서 아만다가 두 사람에게 "돌아가"라는 손짓을 한다.
그녀 입장에서 보면 생판 모르는 어른들이 불쑥 찾아와선 동행까지 요청했으니, 불신을 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그녀는 환경 탓인지 '어른'이라는 존재에 강한 불신을 품고 있는 듯하다. '비슷한 또래인 레오나도 함께 왔어야 했나?' 하이데른이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돌로레스의 목소리가 공원을 팽팽하게 감싼 긴장의 끈을 잘랐다.
"다음 대회에, 그 소년...... 슌에이가 참가한다고 해도?"
그 말에 이슬라의 두 어깨가 굳었다. 그녀는 공원 밖을 향해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뒤돌았다.
"슌에이라면...... 수염 할아버지와 졸려 보이는 꼬마랑 같이 나왔던, 음침하고 비호감인 헤드폰 자식? 왜 그 녀석 이름이 나오는데?"
이슬라의 목소리에는 아까 태도와는 달리 미묘하게 흥분이 섞여 있었다. 그것을 꿰뚫어 보듯, 돌로레스가 웃는 얼굴로 안경 브릿지를 밀어 올리며 대답했다.
"그건 지구에 단 한 사람, 너만이 그와 같은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윽!"
"너도 계속 신경이 쓰였잖아? 자신과 같은 힘을 가진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뜬 이슬라가 두 사람 쪽으로 돌아봤다. 돌로레스의 질문에 대답하진 않았지만, 두 눈에 깃든 경악과 굳은 표정이 대답을 대신했다.
돌로레스는 짧은 한숨을 쉬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슬라를 응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너희의 '환영을 조종하는 힘'...... 그 기원과 비밀에 대해 알고 싶었던 적 없어?"
"나와 아만다의...... 비밀......"
"네가 우리에게 협력해서 실력을 충분히 보여주면 모든 걸 알려줄게. 약속해."
당황한 눈빛으로 동요하는 이슬라의 옆을 아만다가 초조하게 맴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긴 침묵 속에서, 공원의 놀이 기구가 바람에 흔들려 끼익끼익 삐걱대는 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유난히 크게 울렸다. 멀찍이서 공을 차던 아이들이 다다닥 뛰어 공원을 떠난 직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슬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신들에게 협력하면 우리 정체가 뭔지 알려주는 거지?"
하이데른은 쥐어 짜내는 듯한 이슬라의 질문에 조용히 답했다.
"협력에 대한 보수는 반드시 지불하마."
그 대답을 들은 이슬라는 깊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잡념을 떨쳐내듯 고개를 젓고는 하이데른과 돌로레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흥. 딱히 당신들을 믿는 건 아냐. 어른 따윈 믿지 않거든...... 그래도......"
이슬라는 캡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밀어 올리고, 입꼬리를 추켜 올렸다. 그 당돌한 웃음이, 하이데른과 돌로레스가 처음 본 그녀의 웃는 얼굴이었다.
"나를 리더로 삼아준다면, 같이 할게!"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한 날씨. 뜨거운 햇볕이 쨍쨍 쏟아지는 정오, 사우스타운의 메인 스트리트에 선 두 남자. 그들은 짐주머니를 어깨에 메고 눈부시게 빛나는 가게 간판을 올려다본다.
행렬이 늘어선 가게 입구 위에는, '극한류 불고기'라는 네 글자가 눈부신 햇살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왁자지껄 떠들며 메뉴를 살피는 사람들의 줄을 멀리서 바라보며, 남자 중 한 명――마르코 로드리게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불고깃집 경영은...... 매우 순조로워 보이는군요......"
"그래......."
기억하는 것보다 크고 호화로운 그 가게를, 또 한 명의 남자―― 료 사카자키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마음으로 올려다보았다. 불안이라고도, 불만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부끄럽지만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감정을, 료 자신도 표현할 길이 없었다.
수행으로 아무리 잡념을 떨치려 해도 '극한류 불고기'라는 글자를 떠올릴 때마다 먹구름처럼 응어리진 감정이 지독하게 끓어올랐다. 그리고 그 감정은 지금도 분명히 료의 가슴 속을 암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료와 마르코는 가게 옆에 있는 직원 입구로 향했다. 인터폰 너머로 이름을 말하자 바로 사무실로 안내받았다. 깔끔한 사무실에서 두 사람을 맞아준 이는 료의 아버지인 타쿠마 사카자키, 료의 친한 친구이자 동문인 로버트 가르시아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료와 마르코의 모습을 보고는 미소 지으며 일어섰다.
"오오, 료, 마르코! 돌아온 거냐!"
"둘 다 진짜 오랜만이군! 마중 못 나가서 미안했다."
로버트는 료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짧게 인사하는 마르코 옆에서 료도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괜찮아. 아버지와 로버트도 잘 지내는 거 같아 다행이야. 유리는 어디에――"
여동생의 모습을 찾으려 료가 시선을 움직인 순간, 열려 있던 문에서 완전히 녹초가 된 유리 사카자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그들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채 힘없이 방 안에 들어왔다.
"아무리 용돈 때문이라지만 역시 피곤해~....... 미안 로버트 씨. 오늘도 도장엔 못 들를 것 같아......"
"수고했어, 유리. 극한류 불고기의 마스코트에게도 휴식은 필요하지. 일은 끝났으니까 푹 쉬어."
"응, 그럴게! 내일은 대낮까지 잘래~ ......근데 어라? 오빠들, 돌아왔구나!"
로버트의 위로를 받고 활기를 되찾았는지, 아까보다 허리를 곧게 편 유리는 그제야 료와 마르코의 존재를 알아챘나 보다. 불고깃집 아르바이트로 바빠 보이는 유리의 모습을 보자, 료의 마음속에서 왠지 암운이 뭉게뭉게 휘몰아쳤다.
"다녀왔어. 유리도 잘 지낸 거 같네."
"뭐 그렇지~. 그런데 요즘은 아르바이트 때문에 바빠서, 보다시피 녹초가 됐어."
언제 머리를 길렀는지 땋은 머리를 흔들며 오빠를 향해 웃는 유리를 보고, 료는 '일을 돕는 건 전혀 나쁜 일이 아니야'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료는 타쿠마와 로버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 그건 그렇고. 수행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KOF에 출전할까 하는데, 아버지와 로버트는 어떻게 할 거야?"
"지금은 향후 경영을 좌우할 중요한 안건이 있어서 말이다. 난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타쿠마의 말에 료의 눈썹이 살짝 처졌다. 하지만 본인을 비롯해 아무도 그걸 눈치채진 못한 듯했다. 타쿠마는 팔짱을 낀 후, 로버트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로버트, 료와 함께 출전하고 와라! 극한류 불고기 홍보도 잊지 말고!"
"네!"
스승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후, 로버트는 다시 료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내밀었다.
"요새 가게 경영을 돕느라 바빴지만, 슬슬 도장 밖에서도 몸을 움직여 볼까 하던 참이었어! 이번에도 잘 부탁한다, 료!"
"......그래! 기대할게, 로버트!"
료는 로버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굳게 마주 잡은 손에 안도를 느꼈는지, 료의 얼굴에 평소와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 표정을 보자 마르코도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앞으로 한 사람 더 필요해. 하지만 나랑 료라면...... 역시 나머지는 유리겠지."
"맞아. 오빠, 나한테 딱 맡겨!"
로버트의 말에 유리가 몸을 내밀었다. 료는 그런 여동생의 모습을 웃음을 지우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금 전 유리의 언동을 머릿속으로 반추하며 잠시 침묵한 후, 료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이번에 유리는 두고 간다."
"뭐......!?"
"어? 어째서?"
유리와 로버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타쿠마는 팔짱을 낀 채로 상황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고, 마르코는 짐짓 걱정스러운 시선을 료와 유리에게 보냈다.
험상궂은 표정을 유지한 채로 료가 유리에게 물었다.
"유리, 마지막에 도장에서 수행한 게 언제지?"
"어 그러니까...... 아, 아마...... 2개월 전이었나......"
"그 정도면 실력이 둔해지고도 남아. KOF에 출전하는 건 수련을 거듭한 강자들뿐이라는 걸 너도 알고 있잖아. 단언해. 느슨해진 지금의 너는 아무도 쓰러트릴 수 없어!"
"......윽!"
유리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하지만 오빠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는 자각은 있었을까? 반론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말문이 막히기라도 한 양 그녀는 입을 우물거릴 뿐이었다.
잠시 부들부들 몸을 떤 후, 유리는 쥐어짜내듯이 크게 소리 질렀다.
"너무해...... 느슨해졌다니......! 그렇지 않아! 오빠 바보!"
사무실을 뛰쳐나가는 유리의 등을 바라보는 료의 옆모습을 보고, 로버트는 이해한다는 듯 가볍게 끄덕였다. 그리고 친구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타이르듯이 말했다.
"유리는 지기 싫어하잖아. 걱정 안 해도 제대로 감을 되찾아 올 거야."
"......"
료가 대답 대신 작은 한숨을 뱉자, 로버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진짜 세 번째는 누구로 할 거야? 마르코인가?"
지명을 받고 순간 몸이 굳은 마르코 옆에서, 료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아니, 한 명 떠오르는 사람이......"
오픈 전이라는 팻말이 걸린 바 일루전의 가게 내부. 카운터 안쪽에서 킹은 유리잔을 정성스레 닦고 있었다. 조용히 오픈 준비를 하는 그녀의 귀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실내로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얼굴을 들어 차갑게 내쫓으려 했다.
"아직 오픈 전이야...... 어라, 당신이구나. 놀랐잖아."
"준비 중인데 미안하군. 거기 앉아도 될까?"
그러나 가게 안에 들어온 남자가 료라는 걸 깨닫자, 그녀는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료는 한 손을 들어 인사하면서 바 카운터의 한 자리로 다가갔다.
"앉아. 뭐 마실래? 수행이 끝난 기념으로 한 잔 줄게."
"됐어......"
마주 보듯이 앉은 료의 진지한 표정에, 킹은 아름다운 눈썹을 불안한 듯 찌푸렸다. 수행이 끝난 뒤 이런 표정을 짓는 일은 드물었기에 무슨 일인지 물어볼 생각으로 그녀가 유리잔을 놓자, 료는 결심한 듯이 고개를 들었다.
"저기 킹, 긴히 할 말이 있는데."
료가 똑바로 눈을 바라보자, 킹은 멈칫했다.
"뭐, 뭐야, 정색하고."
"나와 넌 속마음을 터놓을 정도로 오래 알고 지냈잖아.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사이이지."
료의 말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어, 킹은 허둥지둥했다.
"그만큼 서로 잘 안다는 뜻이지. 그래서 난 너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으, 으응......"
그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고, 그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그의 성격으로 볼 때 극한류나 격투가에 관한 이야기일 테지만, 그래도―― '사랑 고백'일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지 않을까. 평소 의식하던 상대의 생각지 못한 발언에, 킹은 자못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볼을 빨갛게 물들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료는 눈을 부릅뜨고 바 카운터에 손을 짚으며 몸을 내밀었다.
"부탁해! 이번에 우리와 함께 KOF에 출전해줘, 킹!"
킹은 한숨을 뱉으며 바 카운터에 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기대했던 자신이 한심해서 한 행동이었지만, 료는 "안 되겠어!?"라며 걱정스레 소리를 높였다.
"아니, 좋아. 이번 KOF는 보류하고 있었거든...... 마이는 알아서 다른 상대를 찾겠지 뭐."
그렇게 말하며 킹은 긴장한 표정의 료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럼......!"
"좋아. 너희와 한팀이 되는 것도 오랜만이네, 료."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킹!"
료는 기쁘게 웃으며 거칠고 투박한 손으로 킹의 손을 잡았다. 굳은 악수를 하며 킹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둔하기는.'
영원하다고도 할 수 있는 어둠 속에서 그들이 본 것은, 별안간 나타난 '균열'이었다.
균열은 금세 퍼져나가 중심이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갔다. 그 틈새로 보이는 것은 무수한 빛이 깜빡이는 세계였다. 그곳은 마치 은하 같으면서도 이 세계의 이치에서 벗어난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얇은 가죽 한 장을 사이에 둔 듯 가깝지만, 영원히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할 정도로 아득히 먼 균열. 그 너머에서 기척을 느낀 순간, 그곳에서 무수한 '손'이 솟아 나왔다.
수많은 '손'의 격류는 어둠 속으로 몰려들었고, 그곳에서 주저하기만 하는 그들을 삼켰다. 무언가 금이 가고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한 그 순간―― 나나카세 야시로, 셸미, 크리스는 함께 익숙한 대지 위에 쓰러져 있었다.
세 사람이 눈을 뜨고 며칠 후, 그들은 카페의 한쪽 구석에서 다른 손님들처럼 평온한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에게 그 광경을 보여준 장본인이 어디 있는 게 틀림없어."
크리스는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테이블 위에 놓인 주스에 손을 뻗었다.
"맞아. 단순한 꿈은 아닌 것 같았어."
"우리를 부활시키고 싶은 누군가의 짓...... 같지는 않았어. 적어도 오로치 일족의 누군가가 벌인 일은 아닌 듯해."
셸미는 방금 산 잡지를 테이블 위에 펼치며, 야시로는 갓 만들어진 샌드위치를 볼이 터지도록 입에 넣으며 대답했다.
크리스는 빨대에서 입술을 뗀 후, 잔을 코스터 위에 놓으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한순간이었지만...... 꽤 이질적인 힘이었어. 다른 지구의사의 짓이라 해도 수긍할 정도로."
그의 말을 들은 야시로는 샌드위치를 입으로 가져가려다 멈췄다. 그리고 샌드위치를 손에 쥔 채로 맞은편에서 멍하게 스마트폰을 만지는 크리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크리스는 야시로의 시선을 눈치채고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확실히 그래. 하지만 그게 누구면 어때? 써먹을 수 있다면 이용해야지. '초대장'도 이렇게 손에 넣었고 말이야......"
호화로운 실링 왁스가 입혀진 한 통의 편지를 한 손으로 팔랑팔랑 흔들며, 야시로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의 표정에 크리스도 덩달아 웃었다.
"야시로도 참. 여전히 단순하네...... 하지만 맞는 말이야."
두 사람이 각자 샌드위치와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되돌리려던 그때, 옆에서 잡지를 읽던 셸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머나?"
그녀는 펼쳐진 잡지를 돌려 야시로와 크리스 쪽으로 내밀고, 손가락으로 지면의 한쪽을 가리켰다.
"야시로, 크리스, 이것 좀 봐. 그 '손' , 얘의 이거랑 분위기가 비슷하지 않아?"
셸미가 흥분된 목소리로 가리킨 것은 'THE KING OF FIGHTERS 특집'에 실린 기사의 한 부분이었다. 거기에는 지난 KOF에서 촬영되었을 법한 사진이 게재되어 있었다. 피사체는 커다란 환영의 손을 조종하는 한 소년이었다.
"이름이 슌에이래. 사진은 저화질이지만 얼굴이 꽤 귀여운걸♪"
황홀하게 뺨에 손을 갖다 대는 셸미. 야시로와 크리스는 한 번 서로를 마주 보고서는 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 말대로 사진은 멀리서 촬영한 탓에 화질이 좋지 않았기에 야시로는 미간을 찌푸렸다.
"확실히 분위기는 그렇긴 한데, 이런 사진으로는......"
"대회에서 직접 확인해 보면 되잖아?"
두 사람이 대답하자, 셸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잡지를 다시 자기 쪽으로 돌렸다.
"맞아. 우후후, 한층 더 기대되네♪"
야시로는 손에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욱여넣고는 곧장 눈앞의 아이스커피에 손을 뻗었다. 크리스도 잔을 집어 들었지만, 얼음이 잘그락대는 소리를 내자 "앗" 하고 짧게 탄식하고는 가게 안을 돌아다니는 점원을 불렀다.
"저기요, 주문 좀 할게요."
셸미는 "네" 하면서 걸어오는 직원을 곁눈질하고는, 잡지 기사를 열심히 읽으며 한 장씩 넘겼다.
평온한 오후의 공기와 가게에 흐르는 나른한 BGM 때문인지 야시로는 크게 하품하더니, 몸을 앞으로 기대며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 소리에 옆 테이블의 여고생들도 무심코 뒤돌아봤지만, 금세 시선을 거두고 자신들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럼, 슬슬 신곡 이야기를 해 볼까?"
셸미는 그의 말에 잡지를 덮었고, 크리스는 스마트폰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아, 그랬지. 딴 데로 새서 미안해."
"부활 라이브 기대된다. 셋이서 좋은 곡을 만들어 보자."
그렇게 세 사람은 일상으로 녹아들어간다.
옆 테이블에서 수다로 꽃을 피우는 여고생들도, 맞은편에서 신문을 읽는 회사원도, 졸린 듯이 가게 안을 배회하는 종업원도, 누구 하나 그들의 대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다. 나이 차이가 나는 평범한 친구들로 보이는 이 셋이 인류의 멸망을 바라는 오로치 일족이라는 사실을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해 질 녘을 맞이한 사우스타운의 한 모퉁이, 손님의 발길이 늘어나기 시작할 무렵 그들은 파오파오 카페에 모였다.
테리 보가드와 앤디 보가드는 네온사인이 환히 빛나는 바 카운터에서 조금 떨어진 테이블 석에 앉아, 그들의 일행인 남자를 문득 바라보았다. 그들이 요리에 손을 뻗으려다 멈칫한 건 친구인 죠 히가시가 조심스레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번 『THE KING OF FIGHTERS』 참가를 앞두고, 우승했을 때 이루고 싶은 목표를 서로 맹세하자―― 그의 제안을 요약하자면 바로 이랬다. 죠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앤디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맹세를 하자니...... 딱히 상관은 없지만, 왜 또 그런 걸 하잔 거야?"
"그냥 참가해서 평범하게 우승하는 건 시시하잖아? 질 수 없는 이유도 생기고 의욕도 올라가니 일석이조란 말씀!"
죠는 그렇게 말하고 아무렇지 않게 웃더니, 닭튀김을 가득 입에 넣었다. 그런 친구의 모습을 보고 테리도 환하게 웃었다.
"죠다운 생각이야. 좋아, 하자!"
하얀 이를 보이며 웃는 테리와 그 옆에서 동의하듯 호의적 미소를 짓는 앤디를 보고, 죠는 만족스럽다는 듯 눈썹을 추켜세운다. 그는 포크를 내려놓고 자세를 고쳐 앉으며 두 사람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헤헷, 너희라면 승낙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럼 먼저 내 맹세는......"
"어라, 지금 당장 말해야 해?"
"당연하지! 잘 들어. 이번에 우승하면 나는......"
앤디의 말에 대답하기 무섭게 죠는 잠시 주먹을 불끈 쥐더니, 기합이 잔뜩 들어간 말과 함께 벌떡 일어나 승리 포즈를 취했다.
"나는 릴리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겠어!"
엄청난 성량을 자랑하는 죠의 목소리가 파오파오 카페의 벽에 메아리쳤다. 다른 손님들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뜨겁게 그들을 바라보는 죠의 얼굴을 보고, 보가드 형제는 궁금증이 풀렸다. 애초에 죠가 이 일을 제안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으리라.
"아아, 그렇지...... 그럼 기합이 들어갈 만하지."
"하하하. 우리도 죠의 연애를 위해서라도 질 수 없겠는걸."
그렇게 말하며 앤디와 테리는 얼굴을 마주 보고 미소 지었다.
다시 의자에 앉은 죠는 맥주잔에 손을 뻗은 뒤, 앤디에게 시선을 향했다.
"좋아! 그럼 다음은 앤디!"
"나!? 목표, 목표라......"
앤디는 턱에 가볍게 손을 대고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시라누이류 도장에서 밤낮으로 단련하고 있지만, 도장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느낌이 있어. 아무래도 오래 자리를 비울 순 없겠지만 초심으로 돌아가 무사 수행을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의 태도에 테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 수행, 괜찮은데?"
"다만, 그러면 누군가가 네 이름을 부르며 쫓아올 거 같은데 말이지~"
"넌 마이를 뭐로 생각하고...... 아니, 응, 아예 부정하진 못하겠는걸......"
히죽 웃는 죠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 모습을 상상하기라도 했는지 앤디의 말투가 점점 흐려진다. 앤디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음료를 마신 후, 이번엔 테리에게 물었다.
"형은 뭘 할 거야?"
테리는 잠시 말이 없더니, 평소처럼 웃으며 선뜻 답했다.
"그래. 나는 세계 일주를 하고 올까."
"그건 지금도 하고 있잖아!"
"맞아. 하지만 그래서 형다워."
입꼬리를 올리는 테리를 보고 죠는 껄껄 웃었다. 그런 죠의 모습에 앤디의 입가에도 덩달아 미소가 번졌다.
세 명 모두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평소와 같기에 서로 안심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리라. 맹세가 있든 없든, 그들의 본질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래. 이건 맹세와는 다른 이야기인데, 대회가 끝나면 마리와 마이도 불러서 다 같이 해변에 가자."
"아, 좋은데! 반드시 우리가 우승해서 우승 기념 휴가를 떠나자고."
"그때는 나와 릴리의 관계도 진전됐겠지. 뭐, 좋은 소식 기대하라고!"
밖에선 해가 저물었는지, 손님들의 발길이 점점 늘어나 빈자리를 하나둘 채웠다. 한층 붐비기 시작한 가게 안에 세 사람의 웃음 섞인 대화 소리가 녹아들었다.
깊은 밤. 지하철역 구내, 어둠 가득한 터널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남자의 코트 자락이 휘날렸다. 살짝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빛은, 등 뒤에서 하이힐 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두 여자를 향하고 있었다.
"기분이 어때......? 야가미 이오리."
"크크크...... 상태를 보니, 아직은 피의 충동을 견뎌내고 있나 보군. 재미없게."
매츄어와 바이스. 오로치 일족의 일원이면서 망령처럼 야가미 이오리를 따라다니던 두 미녀는 서늘하리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타일 몇 장을 사이에 두고 멈춰 섰다.
"말했잖아? 악몽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깨진 그릇에서 넘쳐 나온 망자는 지금도 온 세계를 떠돌고 있어."
"당신 피가 들썩이는 것도 전부 절망의 전조...... 세계에 나타난 균열은 지금도 계속 갈라지며 커지고 있어."
"무슨 일인가 했더니...... 시시해."
구내에 부웅 소리가 울리더니, 전광판의 희미한 빛을 덮어버릴 듯한 보랏빛 불꽃이 그 자리를 비추기 시작했다. 어딘가 불길하면서도 정직할 정도로 가혹함이 깃든 그 불꽃을 보고 매츄어와 바이스가 미소 지었다.
이오리는 보라색 불꽃에 휩싸인 손가락을 굽히고는 천천히 뒤돌았다.
"꺼져라. 안 그러면...... 이 불꽃으로 지옥에 보내주마."
매츄어는 몸을 태워버릴 듯한 살의를 온몸으로 느끼며 만족스러운 듯 숨을 내쉬었다. 한편, 바이스는 마음에 드는 놀잇감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히죽히죽 웃었다.
어깨 힘을 뺀 그녀들의 뒤에서 조명이 점멸했다. 암전될 때마다 두 사람의 모습이 보라색 불빛에 물들었고, 눈이 반짝였다.
"당신이 악몽 속에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모습, 특등석에서 구경해 볼까?"
"제발 우리를 실망시키지 말아줘."
바이스가 천천히 몸을 흔들고, 매츄어는 요염하게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손가락이 이오리의 등 뒤를 가리켰다.
"운명의 시간이 머지않았어......"
팽팽한 긴장의 끈을 끊어버리듯 회송 차량이 굉음을 내며 그들의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노려보던 장소에 이미 두 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오리는 돌풍에 머리카락과 코트를 휘날리며, 어느새 불꽃이 꺼져버린 주먹을 천천히 말아쥐었다.
이오리의 등 뒤에서 하이힐이 타일에 또각또각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규칙적인 발소리는 곧장 이오리의 바로 뒤까지 쫓아왔고, 고요한 시선이 그의 등에 꽂혔다.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어."
여성의 목소리에 야가미 이오리가 뒤돌아본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여성―― 카구라 치즈루는 이오리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삼신기로서 한 번 더, 내게 힘을 빌려주지 않을래? 야가미 이오리......"
맑은 하늘. 흘러가는 엷은 구름을 등지고 비둘기떼가 날아간다.
시내 어딘가, 도시의 떠들썩함도 덜한 공원에서 한 청년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분수 소리를 배경으로 서 있는 남자―― 쿠사나기 쿄는 손목시계를 흘깃 쳐다본다. 약속 시간까지 앞으로 1분 남았을 즈음, 바이크 엔진음이 고요한 나무 사이로 울려 퍼졌다.
"미안해. 기다렸지?"
눈앞에 멈춰 선 스포츠 바이크. 거기에서 사뿐히 내리는 여성을 보며 쿄는 어깨를 으쓱였다.
"웬일로 늦었군, 카구라."
"교통사고 때문에 국도가 봉쇄됐거든. 급한 마음에 속도를 좀 냈지 뭐야."
"뭐야, 설마 조급한 마음에 규정 속도를 어기진 않았겠지?"
바이크를 한 번 쳐다본 후 농담을 섞어가며 물어보는 쿄에게, 치즈루가 헬멧을 벗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그렇게 대답한 그녀는 한숨을 내뱉고는, 태도를 바꿔 진지한 눈빛으로 쿄의 두 눈을 응시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갈까? 쿠사나기."
치즈루의 그 말을 들은 순간, 쿄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의 장난스러운 태도가 사그라졌다.
구름이 태양을 가렸는지, 공원을 비추던 햇빛의 온기가 사라졌다. 약간 추위가 느껴질 정도의 그늘이 두 사람을 덮쳤다.
"저번 대회에 나타났던 정체불명의 괴물 '버스'...... 그 안에서 부활한 건 우리가 없앤 오로치의 잔류 사념만이 아니었어."
"그래...... 이 녀석들 말이지?"
치즈루의 말을 들은 쿄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냈다.
며칠 전 치즈루가 보낸 메일에 첨부되어 있던 사진 한 장. 그 사진에 포착된 건 거리에 녹아든 세 명의 남녀―― 예전에 쿄 일행이 직접 쓰러트려 봉인했던 오로치 일족의 모습이었다.
치즈루는 험악해진 쿄의 표정을 보며, 굳은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어갔다.
"그때 이후로 오로치의 봉인에 누군가의 힘이 간섭하고 있어. 다행히 지금은 야타의 힘으로 튕겨낼 수는 있을 정도지만...... 나날이 힘이 강해지는 것 같아."
"그것도 이 녀석들 짓이야?"
쿄가 스마트폰에 표시된 사진을 가리키자, 치즈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안타깝게도 거기까지는 모르겠어. 단지...... 오로치 사천왕의 힘이라기엔 뭔가 이질적이야. 형용하자면, 이치 그 자체를 변질시키는 듯한......"
치즈루가 하던 말을 멈췄다. 한층 강한 바람이 불어와 나무들이 바스락대며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를 냈고, 멀리서 까마귀 울음이 들려왔다.
"그들이 어떤 일을 벌이려고 하는지, 아니면 그들도 휘말렸을 뿐인 건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진실을 알려면 당신과 야가미의 도움이 필요해."
구름 사이로 잠시 햇빛이 내리비쳤다.
치즈루는 예의를 갖춘 모습으로 쿄를 똑바로 바라보고 선 후, 당차게 입을 열어 말했다.
"모쪼록 삼신기로서 한 번 더, 내게 힘을 빌려주지 않을래? 쿠사나기 쿄......"
쿄는 치즈루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고개를 떨궜다.
"참 나. 선조가 어쨌다는 둥 사명이라는 둥 나와는 상관없다고 말했잖아. 게다가 야가미랑 붙어 다녀야 한다니 소름이 끼친다고. 절대로 안 해."
쿄는 그렇게 딱 잘라 말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다고 네가 단념할 리가 없겠지. 이번뿐이야."
그는 고개를 들어 치즈루의 시선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짜증으로 굳어있던 표정은 체념한 것도, 당황한 것도 아닌 쓴웃음으로 바뀐다. 그 모습에 불안으로 그늘졌던 치즈루의 표정도 밝아지고,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고마워, 쿠사나기."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쿄가 휙 등을 돌리며 말했다.
"함께 손을 잡는 건 괜찮지만, 나도 조건이 있어."
"조건?"
"성가신 일이 끝나고 나서, 내가 하는 일에 참견하지 않겠다고 하면 생각해 볼게."
어째서일까, 어깨너머로 들려온 쿄의 말에 치즈루는 되려 쓴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에 묻혀버릴 듯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들,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응?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야."
치즈루는 바이크에 손을 뻗어 헬멧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바이크에 다시 올라타며 쿄를 불렀고, 쿄는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알았어. 목적을 달성한 후라면 당신들 행동에 절대 간섭하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하지만 오로치의 봉인에 간섭하고 있는 위협을 제거할 때까지는...... 삼신기로서 사명을 우선으로 확실히 협력해줘."
"그래그래, '협력'해야지. 최소한의 노력은 할게."
치즈루는 귀찮은 듯한 그의 대답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왔을 때와 같이 바이크 엔진 소리를 울리며 떠났다. 쿄는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배웅한 후, 손에 든 스마트폰을 다시 바라봤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아까와는 다른 메시지였다. 발신자가 표시되는 곳에는 '아버지'라 적혀 있었다.
"자...... 이쪽 성가신 일은 어떻게 한담."
난처한 듯한 말투와는 달리, 그의 손가락이 거침없이 움직이더니 한 사람의 전화번호에서 멈췄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 번호를 누른 쿄는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걷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베니마루?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텅푸루에게 KOF 초대장이 도착한 다음 날.
"나는 이번 대회에 참가하지 않을 생각이다."
입을 연 스승의 첫 마디에, 슌에이와 메이텐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이유가 뭐야? 할아버지!"
"으엥~ 그럼 우리는 이번에 참가 안 하는 거야?"
눈을 흘기며 성을 내는 슌에이, 그리고 그 옆에서 슬픈 표정을 짓는 메이텐쿤을 향해 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번엔 쿠사나기 쿄와 팀을 짜서 나가 보거라."
"쿠사나기 쿄랑?"
"그래. 슌에이, 메이텐쿤...... 너희는 지난 대회를 거치며 정신적으로도 성장했다. 지금의 너희라면 내가 아닌 격투가와도 팀을 짤 수 있을 것 같구나. 이것도 다 수행의 일환이야."
텅이 두 사람에게 항공권을 내밀었다. 슌에이와 메이텐쿤은 그것을 한 장씩 받아 종이에 인쇄된 글자를 바라봤다. 텅은 그런 두 제자의 모습을 훈훈하게 바라봤다.
"사이슈 공에겐 말해 두었다. 일본 여행,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그런데 왜 쿠사나키 쿄 대신에 당신이 나왔어? 니카이도 베니마루."
중국에서 일본에 도착한 직후, 공항 입구에서 슌에이와 메이텐쿤을 맞이한 이는 쿠사나기 쿄가 아니라 그와 자주 팀을 짜던 사내, 니카이도 베니마루였다. 베니마루는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는 슌에이와 그 옆에서 꾸벅꾸벅 조는 메이텐쿤을 보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양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였다.
"쿠사나기 쿄가 '다른 용건' 때문에 바쁘거든. 대신 가 달라고 부탁하더군."
"말해 두긴 뭘 말해 뒀단 거야......"
어이없어하는 슌에이에게 베니마루가 "동감이야"라며 이마를 짚었다.
베니마루가 쿄에게 대신 가 달라는 부탁을 받은 건 어제였다. 다이몬은 유도 연맹의 업무가 들어왔고, 쿄도 '다른 볼일' 때문에 어딘가로 나가버려 이번 KOF 참가는 보류인가 하던 참에 갑자기 연락이 왔다고 한다.
베니마루는 두 사람에게 그렇게 설명한 후, 짐짓 슌에이와 메이텐쿤을 뒤돌아봤다.
"내가 팀 동료라도 상관없지? 너희한테 딱히 다른 수도 없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한데. 한 번 싸운 적이 있다 해도...... 우리는 당신에 대해 잘 몰라. 이건 그쪽도 마찬가지잖아? 만약에......"
――만약에 내 힘을 제어할 수 없게 돼서 폭주라도 한다면......
슌에이는 그렇게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 숙이는 그 모습에 베니마루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가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으하암" 큰 하품 소리가 났다.
"슌, 괜찮아~"
메이텐쿤은 베개를 한쪽 팔로 끌어안으며 나머지 한쪽 손으로 슌에이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는 몽롱하고 졸려 보이는 눈으로 슌에이와 베니마루를 차례차례 쳐다본 후,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수행의 일환이라고 했잖아...... 우리, 지금부터 친해지면 되지 않을까? 그러니 잘 부탁해, 베니마루 씨."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내민 메이텐쿤을 본 슌에이도 그제야 긴장을 풀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긴 하네. 잘 부탁해, 니카이도 베니마루."
"그래, 잘 부탁한다. 슌에이, 메이텐쿤."
세 사람은 악수를 했다. 그때 하늘에서 비행기 이륙 소리가 들려왔다. 슌에이와 메이텐쿤이 휙 고개를 들자 맑게 갠 해질 녘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와 기체 꼬리와 이어진 비행기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에게 우승 소식을 가지고 돌아가자."
"에헤헷, 그러자."
베니마루는 마주 보며 웃음 짓는 슌에이와 메이텐쿤의 어깨를 툭 치며 웃어 보였다.
"그럼, 팀 결성 축하도 겸해서 뭔가 먹으러 가자. 내가 쏠 테니 먹고 싶은 걸 골라."
"정말!? 고마워, 베니마루 씨! 그럼 난 와규 불고기를 먹어 볼래!"
"야, 메이텐. 눈치 좀 챙겨......"
"와규 불고기 말이지? 오케이. 잠깐만 기다려."
슌에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듯한 표정으로 손을 번쩍 든 메이텐쿤을 팔꿈치로 쿡 찔렀다. 그러나 베니마루는 두 사람의 행동엔 아랑곳없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식당을 검색했다. 잠시 후, 그는 스마트폰을 두 사람 앞으로 내밀었다.
"이 가게는 어때? 얼마 전에 친구랑 갔었는데 맛은 나쁘지 않았어."
눈앞의 화면을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니, 흑우 와규로 보이는 윤기 나는 고기 모둠과 다양한 사이드 메뉴의 사진이 차례차례 나타났다. 슌에이와 메이텐쿤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으며 사진을 바라봤다.
"어, 엄청난데. 정말 괜찮겠어?"
"신경 쓰지 마. 결성 기념인데 이 정도는 먹어야지?"
시원스럽게 말하는 베니마루의 웃는 얼굴에선, 슌에이와 메이텐쿤에게 멋지게 보이려고 허세 부리는 연장자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슌에이는 베니마루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뜻밖인걸......"
"응?"
"당신, 화려하고 경박해 보였는데 꽤 세심한 것 같아서."
"흐흥. 레이디들은 이런 의외성을 좋아하거든. 인기를 얻는 비결이지."
그때 메이텐쿤이 화면을 슌에이에게 보여주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슌, 이거 봐! 디저트도 잔뜩 있어!"
"정말!? ......우와, 엄청 맛있겠다......"
형형색색 디저트 사진에 슌에이의 표정이 저절로 누그러졌다. 베니마루는 나이에 걸맞은 천진난만함이 엿보이는 그 모습을 보고 싱긋 웃더니, 음식에 푹 빠진 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하,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하는구나. 오늘은 마음껏 먹어도 돼, 슌♪"
"저기, 밥을 사주는 건 고맙지만...... 처음부터 너무 친한 척하는 거 아냐?"
"슌, 부끄러운가 보구나~♪"
"놀리지 마! 참 나......"
환한 석양이 공항 입구에서 멀어져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비춘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모른다. 며칠 후 그들이 한 소녀와 만나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이번 대회를 엄습할 재앙의 서막이라는 사실을.......